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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집사와 봄-고경숙 시집

천천히 걷는 글 고경숙 글에도 걸음이 있다 눈 뜨자마자 읽는 詩 한 편은 묵정밭을 지나 들길을 산책할 때의 속도로 나른하다 걷다 눈에 띄는 들풀이 있으면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고, 시냇물 건널 땐 폴짝 리듬을 타고, 시의 걸음은 비교적 완보다 거친 유세 문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발을 삐기 십상이다 경사가 심하고 뾰족한 바윗길이어서 보폭을 줄이고 신중히 걸어야 한다 엄마 유품을 정리하며 일기를 만난 적 있다 관절염으로 ㅇ자가 되어버린 엄마의 일기는 몇 발짝 가다 쉬고, 한숨 몇 번 쉬다 걸었나 보다 글씨는 삐뚤빼뚤이고 내용은 반복이다 내 걱정은 ᆢᆢ마라 ᆢᆢ 밥은 ᆢᆢ꼭 ᆢᆢ 꼭ᆢᆢ 챙겨 먹고 ᆢ ᆢ 보내준 ᆢᆢ 돈 ᆢᆢ 고맙고 ᆢᆢ 미안 ᆢ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폐광을 거닐다 반짝이는 ..

카테고리 없음 2023.02.23

노을에 중독되다-달무리동인회

달무리동인회 제1집 "노을에 중독되다"가 출간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지난 수년간 습작시를 쓰며 서로의 마음에 중독된 동인들의 순수하고 따뜻한 성정이 배어있다. 글쓰기의 시작과 끝은 동인 활동이라고 할 만큼 글을 쓰는 끝없는 동기부여와 자기성찰은 끈끈한 동인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학업을 통해서 나타난다. 달빛문학회와 함께 해 온 칠 년간의 시간과 열정이 달무리동인회로 이어져 서로의 빛깔에 중독되어 첫 동인지를 출간하는 어린 발걸음에 박수와 갈채를 보낸다. 부디 이런 수고로움이 끝이 아닌 시작으로 끝없이 이어져 생을 건너가는 동안, 성찰과 깨달음의 여정으로 귀결되고 동인들은 모두 서로의 도반이 되어 한여름의 밤하늘을 함께 바라보며 별빛의 미소를 오래도록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서로가 서로의 등대가..

카테고리 없음 2023.02.16

고 김규화 시인 영결식을 마치고

한국 문단의 중추이자 원로 시인이신 고 김규화 시인님의 영결식을 마쳤다. 시전문지로 53년 동안 자존심을 지키며 월간 시문학의 발행인으로 한국 문단의 우수한 문인들을 배출해 온 한 세대가 저물었다. 2020년 고 문덕수 발행인이 고인이 되시고 2년 반만에 시문학의 역사가 저물었다. 고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에서 한국현대시인협회장으로 진행된 영결식은 고인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되었다. 정유준 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영결식은 손해일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전 이상장의 약력보고에 이어서 고인의 오십 년 지기인 이향아 시인의 조사 낭독, 강정화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김철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이혜선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의 추도시 낭독이 이어졌다. 그리고 고인의 대표시 낭독은 한국시문학문인..

카테고리 없음 2023.02.14

병 속의 고양이-김정범 시집

꿈과 제네레이터 깅정범 하늘에 나무를 심고 싶었어 둥근 눈의 식물이 자라나 플레이아데스 신성을 향해 줄기를 뻗는 것을 그렸었지 살아 있다는 건, 전기로 피었다가 이끼로 말라가는 것 물 위에 나무를 심는다 둥둥 떠다니는 나무가 실뿌리를 내리면 따뜻한 전류가 흐르게 될까 기름기 가셔낸 하늘, 탄피 사라진 흰 모래밭 그 위를 맨발로 걷고 싶어 쇠공이 굴러가는 도시에 나무 엔진을 돌리고 싶어 푸른 잎새 속의 공포를 보여줄게 꿈이 바이러스를 뱉어낸다 심장의 제네레이터에서 쏟아져 나오는 전류들 대기의 쟁반에 뿌린다 쇠붙이에 촘촘히 박히는 별의 못, 물빛에 젖는 부식토, 지구 식물의 삼바 춤과 살아 있는 악기들 이 지상에서는 언제쯤 연기가 그칠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바이올렛과 옐로 아니에요, 바이올렛이에요 ..

카테고리 없음 2023.02.13

십일월-송은숙 산문집

송은숙 산문집 '십일월'을 읽고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같이 힘 있다" 민태원의 낭만적인 수필 청춘 예찬이 아니어도 청년기는 그 힘이나 모습이나 열정이나 가능성으로 찬미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청년기는 활기에 넘치고 약동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미숙하여 판단을 그르치기도 하는 시기이다. 오네긴은 랜스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풀이로 렌스키의 약혼녀 올가를 유혹하여 춤을 추고 질투에 눈이 먼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들이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다면 죽음을 담보로 하는 무모한 행동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이라든가 직장이라..

카테고리 없음 2023.02.11

흐믓한 삶-이석구 시집

눈동자 이석구 너는 언제나 맑은 호수 같구나 속속 숨어 있는 깊은 곳 내 작은 욕망까지도 낱낱이 반영하고 마는 너 좁은 터 진흙에 빠지던 날도 너른 터 꽃밭에 눕던 날도 여지없이 정갈하게만 그려 넣어 차분히 나를 채우는구나 맑은 그대안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출근길에 출근길에 십이 층 승강기로 내려오고 있었다 구 층의 문이 열리더니 한 사월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탔다 "비 오는데?" "아, 가방에 우산 있어요" 가방을 열어, 그녀 참 살갑게도 인사하였다 너도 한 칠월쯤 되면 말조차 걸기 힘들어지겠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간의 강 끝 모를 시간의 강 그 위에는 온갖 삶의 조각들이 부유한다 매섭게 추워 도는 임신년 정월 어느 아침 출근 준비하던 이십 대 딸이 "아빠는 이제 좋겠다" "왜?" "퇴..

카테고리 없음 2023.02.09

철원이, 그 시정마-장한라 시집

말들의 휴가 장한라 들뜬 마음 눌러두고 함께 오래 마주 봐야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고생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나날들 핥아주며 느긋하게 풍광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뒷발굽도 느껴봐야지 마방을 비집고 들어오는 물안개와 눈 감고도 훤환 부대오름 우진제비오름 길을 지우며 오늘은 조천 바다로 내일은 표선 바다로 미끄러져야지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고 간섭 없는 곳에서 들숨 날숨 껌벅껌벅 눈썹으로 헤아리다 하품 길게 하고 낮잠이란 게 어떤 것인지 별이 뜰 때까지 늘어져 맛봐야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까만 민들레 나는 까만 민들레 지붕 위에서 산다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땅보다 절망의 바다보다 위안이라 나락의 끝 닿은 곳 겨우 겨우 받은 꽃말, 피 ㆍ난 ㆍ민 빈곤과 내전의 아픔이 살점이 되어버린 푸른 혈맥은 얼..

카테고리 없음 2023.02.08

평면과 큐브-김춘리 시집

칼 김춘리 내 귀에는 갈색으로 변한 칼자국이 남아 있다 칼자국이 서로의 귀를 잡고 있다 푹 익은 사과를 깎으면 외로움이 없어질까 사과를 먹고 나면 칼이 사라질까 더 많은 귀가 필요한 시간에는 사과를 사러 가고 지루한 날에는 칼과 사과를 잡아당긴다 둥근 그림자만 남기고 사과를 먹는다 그림자는 젓가락으로 집어라 썩은 사과로 어떻게 젖은 눈물을 통과할 수 있을까 사과 대신 탁자를 선택했어요 외로움이 익는 동안 탁자를 사과라고 부르거나 시계를 그림자라고 부르거나 썩은 사과를 도려낸 손가락으로 칼을 숨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기념일 해변에 있는 소돌 슈퍼는 애니가 좋아하는 가게다 밀가루와 설탕을 할인해 주기도 하고 방울토마토에서 방울 소리가 나면 구름 위의 장미를 주기도 하는데 반값에 세일하는 주걱을 사..

카테고리 없음 2023.02.07

도깨비들의 착각-김태범 시집

그래도 봄은 온다 김태범 세상이 멈춰 버린 봄날 홀로 텃밭으로 나와 부지런히 이랑 들이고 포근하게 비닐 씌워 한 알 한 알 옥수수 심었다 사월의 찬바람은 자꾸만 봄날을 희롱하지만 이랑 속 한여름의 꿈은 하루가 다르게 어둠을 뚫는다 바람의 심술에 애태우며 몇 날 잠을 설치다가 기어이 어둠을 박차고 말끔하게 눈을 뜬 새 아침의 환희를 본다 코로나로 빼앗긴 봄날이지만 그래도 봄은 온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다람쥐의 건망증 용케 찾았나 보다 삭풍에 눈발이 흩날리는데 배고픈 다람쥐 한 마리 마른 숲에서 낙엽 더미 뒤적이더니 꼼지락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다 용케 찾은 도토리 한 알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툭 투둑 가을이 떨어질 때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다니며 겨울 땀을 미리 흘린다 여기저기 열심히 곳간을 감춘..

카테고리 없음 2023.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