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의 끝
심승혁
금 간 지 오래
별일 없는 듯 참아내는 벽을 믿었다
그런 날이 오래
벽은 그대로인 채 금은 깊어지고
사이로 물을 채우는 시간이었던가
그렇게 오래
벽은 멀어지고 금은 짙어져
호수가 된 얼룩을 가르는
검은 수심의 지느러미들, 와르르
집이 무너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비, 고란
무엇을 적어도 좋은 날이었을 테지
INFJ라든가 어머니 끝내ㆍㆍㆍ라든가 5월 21일은 당신을 만난 날이라든가 비가 많아서 젖었어 같은 자백이라든가
시간으로 파 놓은 고랑에 빗소리 졸졸 쌓여 잔뜩 흘러도 좋을, 없어도 상관 없지만 있으면 왠지 든든한,
지난 기록의 바랜 비고란으로 과거를 한 번 더 읽으면
생각이 아무리 비로 씻겨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점점 희게 지워지는 기억 위에 검게 그을린 필쳬처럼, 내일쯤에 지금들을 비워내지 않도록,
비 오는 날을 굳이 기다려 고랑 하나씩에(잊는 일은 없을 만큼만) 채우고 싶기도 하지
훗날 혹여,
잊음에 매몰된 아우성들을 줄ㅡ줄ㅡ이 찾아 듣길 바라면서 무엇을 읽어도 좋은 날이 되도록 말이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꽃 뿔
펄펼 나는 저 꽃잎들
땅 깊이 숨겨둔 뿌리의 말을
고자질 중이다
몰래 쥐어본 소리
시렸던 손끝을 녹여
온몸으로 촉촉 흐르면
온몸으로 촉촉 흐르면
난분분해진 아지랑이에
아차차,
꽃 뿔이 돋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안심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집은 문이 걸렸고
열쇠는 바보같이 안 가져왔고
동생은 가게 일로 바쁘다 하고
친구분은 노래교실에서 신나시고
아지트에는 안 오셨다는데
왜 오늘따라 하늘은 노란 건지
왜 오늘따라 미세먼지는 심한 건지
대체 엄마는 이 날씨에 어디 숨으셨나
한숨이 안개보다 짙어질 때쯤
전화기에 모친이라고 떠오른다
새해 일출도 이보다 환하진않겠다
새까만 투정을 열심히 쏟아내는데
깨끗하게 찰랑이는 엄마 목소리
ㅡ나 목욕탕에 있었다
휴, 목욕탕 전화번호도 저장해야겠다
『손금 안에 연어가 산다』
"핏줄의 인연, 물의 집에서 불의 집으로 향하는 슬픔의 여정"
심승혁 시집 ‘손금 안에 연어가 산다’를 읽고
시인의 언어는 생명의 숨결을 품고 있어야 한다. 시를 쓰는 사람의 숨결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언어를 기억해야 하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체온을 보듬어야 한다. 모름지기 시인은 위선과 자만, 이기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솔직하고 따뜻한 정신을 기루어야 한다.
백두대간의 중추 대관령 자락에 깃들어 살며 동해 바다의 망망대해 수평선과 천평선天平線을 가슴에 품고 사는 강릉 사람, 심승혁은 모천회귀의 언어를 불러와 ‘손금 안에 연어가 산다’고 그의 가슴에 품고 있는 생명의 언어를 시로 풀어 놓았다. 투박하게 툭툭 던지는 현실의 문장들을 통해 자유로운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 [중 략] -----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보고서나 서류의 양식을 채워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난감한 부분이 ‘비고란’이다. 여러 개의 항목을 만들고 꼭 맨 나중에 깍두기처럼 빈칸으로 남겨두는 ‘비고란’은 보고가 끝나고 일이 끝나도 여전히 빈칸으로 남겨두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왜 굳이 비고란을 만들어 서류를 받아 드는 사람마다 고민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을 써야 할까 망설이다가 쓸데없는 낙서를 하거나 강의하는 사람 흉을 보거나 가끔씩은 관련된 정보를 써 넣기도 하는,
그런데 화자는 ‘비, 고란’이라는 쉼표 하나를 사이에 여백으로 남겨 두면서 숨통을 트이게 하고 중의적 표현을 끌어내고 있다. 비가 내리는 것도 비가 내려서 모이는 것도 어딘가로 흘러야 하는 고랑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여백을 만들어 주고 틈을 만들어 주는 것은 흐르게 하고 스며들게 하고 어우러지게 하는 또 하나의 핏줄을 이어주는 일이다.
‘비고란’이 ‘비, 고란’으로 되는 순간 여백에서 여운으로 전환되어 여백과 여운을 잇는 틈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을 만들어 쉼표를 찍어 주고 마음이 어우러지게 하는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중 략] -----
심승혁의 시편들이 궁극적으로 다다라야 할 곳은 모천회귀이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미련 없이 생을 마감하는 연어들처럼, 자신의 생을 다해 핏줄의 인연을 지켜낸 곳에서 ‘물의 집을 짓고-불의 집에 머물다가-다시 물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 같은 시간을 스스로의 멈춤이라는 시간을 통해 곡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손금 안에 연어가 산다’는 화자의 운명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는 ‘길’의 화두를 깨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부레에서 허파로 아가미로 숨을 쉬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연어가 마지막 순간 강으로 돌아올 때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한두 달 동안 해수어로 살았던 기간의 염분을 내보내며 삼투조절을 하며 적응기를 갖고 강물로 거슬러 올라 알을 낳고 숨을 거두는 것처럼 그의 손금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는 물의 집에서 불의 집으로 갔다가 다시 물의 집을 회복하고 불의 집에서 영원히 기거하려는 깨달음의 몸짓이다.
심승혁의 시가 ‘생명의 서정’을 중심으로 슬픔의 핏줄을 당기고 있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김남권 시인 #심승혁 시집 #손금안에 연어가 산다 해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