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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가능합니다-조영란 시집

김남권 2023. 1. 22. 09:40

이면지

조영란

연습된 표정에 빙의 되어 살아왔으니

나의 유일한 성공은
정면이 나의 얼굴이라고 믿는 너의 오해

손에 닿는 촉감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굴곡진 슬픔의 근육들 때문이지

아직도 모르겠니?

뒷모습을 네가 보았다면
또박또박 새겨진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텅 빈 이면만이 나의 진실이었으므로
답하지 않음으로 답했으므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당신이라는 무늬


무늬를 갖고 싶었지
리듬을 타고 형형색색의 상징을 실어 나르는
당신이라는 날개의 빛깔과 꼭 닮은

나비를 만진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눈이 먼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나는 나부끼는 것들이 두려웠던 아이
그러나 어디에 앉을까 자리를 고르는 날개들을 눈앞에 두고도 겁먹지 않았던 건
눈부신 무늬에 기대어 한 생을 건너갈 수 있을 거란 믿음 때문

어떻게 해야 내게도 무늬가 생길까

꽃대처럼 서서 몸을 흔들었지
오그라든 내 어깨 위에 내려앉은 당신의 날개가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나를 붉게 물들일 때까지

영원속을 헤매던 당신의 눈빛과
그 눈빛에 그을린 나의 슬픔이 뭉쳐 하나가 되는
긴 입맞춤의 시간을 지나
잃어버린 계절을 찾아 떠돌던 날개의 여정이 내 몸에 새겨지고 있었지

내 안에서 끝없이 태어나고 저무는
당신이라는 무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봄꿈


나는 돌멩이보다 먼저
고요 속의 고요에 닿아 있다

떠오르지 않아 서러운
물 밖으로 꺼내놓고 싶은 말처럼

놓친 것들과
놓아야 할 것들이 많아서

거짓 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

그러나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너무 가볍지 않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오늘은 가능합니다


언제나 세계는 세워둔 벽을 시름했으므로

이제 우리가 뛰어넘을 차례입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생각해봐요

벽이 사라진다면
미래로 통하는 곧은 선과 길들이 있는 문이 열린다면

오늘은 가능합니다

경계를 지운다는 것은 얼마나 환한 일인가요

용기를 주고 받았으므로
햇살은 누부시게 아름다운 거죠

시간이라는 욕망의 끝은 멈춤이겠지만
걸어보지 않은 길이 있어서 희망은 뛰어가는 거에요

좁은 골목 끝에 서서
삶은 자꾸 오라 오라 하고

그러니 우리 걸음을 아끼지 말아요
오해와 진실이 각자 다른 곳에서 넘어진다 해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꼬리


누군가의 그림자만 보고도 네가 꼬리를 흔들 때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가위가 필요해
매듭이 필요해

휘말린 감정 하나에 온몸 휘청거리며
변명을 비명처럼 컹컹 짖는 것은
제 두려움을 감추려는 허세나 울분일 터

자기 꼬리 자기가 물고
빙빙 도는 허무

버리지 않으면 진화할 수 없는 이야기

잘려 나간 줄도 모르고
없는 꼬리를 흔들고 있는 너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인 조영란은 두렵더라도 조심스럽게 환상과 관념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지켜야 할 것들은 늘 너머를 기웃거리게 한다며 원하는 삶은 질서밖에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언어적 현실로 실현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는 욕망의 작동으로 놓지 말아야 할 것들에 집착하기보다는 놓친 것들과 놓아야 할 것들에 주목하고 거짓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
그러면서 고민한다.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것에 근접할 수 있는 길은 있는 것일까? 용기를 내서 길을 가다 보면 우리는 우연히 또 다른 너머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시는 바로 이러한 고민과 질문들에서 시작된다.
ㅡ장예원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