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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류 흔 시집

나무와 나의 관계 류 흔 믿어주실지 모르지만 나는 나무와 연애를 한다 어둔 숲에서 지조 높은 한 나무를 골라 몸통을 끌어안고 애무한다 과정 중에 나무가 표현을 하지 않는 점이 나는 늘 불만이지만 절정의 순간에 그가 흘리는 수액이 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안다 은밀히 한다고는 하는데 울지 않는 새가 지척에서 지켜볼 때도 있다 우리는 깊이 사랑해서 그런 불편쯤 개의치 않는다 다시 한번 고백하건대 나는 나무와 연애를 한다 솔직히 나무의 진심을 들은 바 없으나 나무와 나는 참으로 거시기한 그런 관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섬 코발트블루 빛깔 광장에 방금 찧은 쌀 한 섬 툭 내려놓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근황 마당에 낙엽이 떨어져있다 가을이니까 그렇다 쓸쓸했다 빗자루를 가져와 쓸어야 할까 낙엽을..

카테고리 없음 2023.01.03

고래, 52-이선정 시집

귤의 장례식 이선정 귤이 죽었다 차에 두었던 귤 하나가 밤새 꽁꽁 얼어 죽었다 소통을 거부한 시인의 시집처럼 소통을 거부당한 독자의 죽음처럼 한때 주홍을 자랑하던 딱딱하게 죽은 귤 하나 따뜻한 아랫목에 모셔 3일장을 치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판정을 거부한다 독자의 등급은 눈동자에 새긴다는데 이상적 독자 최적의 독자 교육받은 독자 정통한 독자가 판정을 기다린다 시인도 A급이냐 B급이냐 F급이냐 저울 질해가며 등급을 매긴다는데 부모도 상급이냐 중급이냐 하급이냐 지랄 같은 세상의 등급을 하사받고 킥킥, 마블링 좋네 도살장에서 난도질 당해 종국에는 엎어져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서도 판정을 기다리는 '꽝' 찍힐 낙인 앞에 얌전히 등을 내밀고 나란히 줄 세워진 것들 저 가벼운 팔목을 비틀지도 못하고 인생아..

카테고리 없음 2023.01.02

계묘년, 토끼를 보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들렀다가 토끼를 만났다 깊은 산속에서 나온 토끼는 책을 보고 있었고 의자에 앉은 토끼는 풀을 뜯어 먹기도 하고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제발 육식 동물들이 채식동물을 잡아먹으면서 순직한 척, 착한 척, 위선 떠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은 그들의 영역을 잠시 빌려 살다가는 채무자인 것을, 점령군이 아니다 새해를 하루 앞둔 지금, 눈속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고라니 너구리 산토끼가 있다 도심의 심장속에도 있다 계묘년 토끼를 바라 보다가, 한 해를 살아남을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서점에 아이들 손을 잡고 온 부모와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과 착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카테고리 없음 2022.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