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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주, 청평의 저쪽-정복선 시집

시詩 -들장미, 로사 카니나 정복선 야생의 숲은 동쪽 끝에 잠들고 수백만 년간 지켜 온 연분홍 말간 미소는 장미 연금술사의 손에서 조작된 기호로 변해 버렸다 가시넌출로 무작무작 뻗어 가는 그 원형질의 향기와 말씀 누가 먼저 원초적 힘을 버렸나 진화의 항해를 떠나며 해마다 변화무쌍한 모르는 얼굴들이 되어서야 내 탓, 네 탓 모두의 탓 몰록, 마법의 잠에서 깨어나 순정한 눈 뜰 수 있을까 들끓는 색채의 섬광을 벗는 순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차마 부르지도 못한 이름 무엇이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나 울타리 밖엔 언제나 돌풍, 피할 수 없는 행려行旅뿐 영혼을 가두지 못한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채 누항陋港 골목길을 겁 없이 다녔다 잘 가꾸어진 여름정원은 이르지 못할 그림이겠지 그땐 이름을 부를 엄두도 ..

카테고리 없음 2024.01.10

모 씨와 모 씨에게-송병숙 시집

및 송병숙 어둠 속에 섬처럼 흔들리는 것들이 있다 제 할 일 하고도 사라지거나 다가오지 못하는 조각조각 부서지는 영상을 본다 디지로그 속 낭만적 거짓 세상에서 '및'이 조각들과 나란히 걸어간다 갓난아기를 업듯 가진 무게를 다 받아줄 수는 없지만 걸치고 나면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및' 사이가 돈독해진 이웃들이 이웃을 부른다 그리고 또 그밖에 뛰어내린 햇살이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에서 그네를 타듯 한 덩어리로 출렁이는 끈끈한 적수들 오늘도 독립을 꿈꾸는 '및'이 모 씨와 모 씨에게 지친 어깨를 내주고 있다 그러고도 그러지 않고도 싶은 저녁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버리지 않아도 되는 대체 공휴일 같은 평화주의지가 결단을 유보한 채 건들거리며 걸어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물밑 경전 작은 발바닥 하..

카테고리 없음 2024.01.09

소설로 읽는 한국문학사 1-고전문학편

소설로 읽는 '한국문학사 1-고전문학편'을 읽었다.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에서 만든 이 책은 유시연, 은미희, 엄광용, 정라헬. 정수남, 마린, 김민주, 하아무, 채희문 소설가가 참여하여 중단편 소설로 집필한 책이다. 한국사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인물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구성한 고전문학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이라 평가할 만하다. 최치원-유시연, 이규보-은미희, 김시습-엄광용, 허균-정라헬, 정철-정수남, 윤선도-마린, 김만중-김민주, 박지원-하아무, 김삿갓-채희문 작가가 참여하여 역사 속 인물들을 인어의 집에 초대해 그들의 삶과 사상을 탄탄한 문장으로 형상화 했다. 이 책의 말미에는 한국고전문학사 연표가 수록되어 C2333년 단군 왕검이 고전을 건국한 건국 신화부터 BC4세기경 ..

카테고리 없음 2024.01.08

오래된 약속-최지인 시집

햇살에 최지인 고욤나무 그늘 밑 뽀작 다가앉는 햇살 갈래머리 동심, 손가락을 펴 들다 두 조막손에 졸조르르 빛살을 늘어놓고 찡긋거리며 바라본 하늘 이쁜 고 가시내 --- 눈이 부시다 어느 결에 물 한 모금 청해 놓고 머뭇거리던 동자 바람, 남우세스럽게도! 햇살이 사방으로 튀었겠다 박하 잎, 화아한 웃음이 허리를 꺾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랑 초기 같이 앞을 보고 걸으면서도 마음은 늘 네 옆모습을 보다가 가끔씩 발부리에 채인다는 거 비오는 날 일부러 친구한테 우산을 줘 버리고 네 좁은 우산 속으로 뛰어든다는 거 네 잔기침 한 번에 내 목도리와 장갑의 주인이 기꺼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거 우연히 손에 들어온 네가 쓰던 볼펜 한 자루에도 가장 소중한 의미가 실린다는 거 어쩌다 스친 네 손길에 심장이 터질..

카테고리 없음 2024.01.04

두원리 연가-문장대 제24집

사자死者의 밥 김경식 씹는 법을 잊었지 그건 이승의 법도 통 입맛이 없구나 소금기 하나 없는 맑은 국물에 말아 넣은 어머니 흰밥 한 숟갈 기제사에 오신 듯 젓가락은 시늉으로 옮겨 짚을 뿐 우물우물 몇 모금 삼켜 넘기고 잘 먹었구나 조용히 상을 물리시네 생시인 듯 꿈인 듯 어슬한 경계에서 씹는 일은 오롯이 남는 자의 몫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배추는 계란의 노른자처럼 노랗게 안으로 꽃핀다 김태원 자기 몸 허물어 뭇 벌레들에게 다 내어주고 언제나 흙 묻은 누덕옷에 허섭만 키우는 줄 알았는데 찬 바람 불고 온 산천 비루먹을 때 터진 끝 공처럼 말아 몸 부풀리고 추상秋霜의 빈 들녘 홀로 지켜내더니 멀리 길 떠났던 동장군 데리고 돌아와 흥부네 박 터지듯 온 뜨락, 무더기무더기 옹골차고 눈부신 황금꽃 쏟아 놓았..

카테고리 없음 2024.01.03

갇힌 언어들을 위한 시간-서옥섭 시집

왕벚나무 -허초희 서옥섭 꽃 핀 왕버나무 한 그루 내리는 빗속에 묵화로 서 있네 남대천 물길 오래오래 안목바다로 흘러들고 봄이 핀 둑길을 걷다 봄 속에서 봄 속으로 보슬보슬 나는 스미어드네 저 꽃 지면 남대천 둑방에는 찔레꽃 원추리꽃 수런수런 피어나고 오랜 세월 지난 뒤에도 한 사람 이 길 속 봄 속으로 종달새처럼 노래 부르며 맑게 걸어가겠네 그대와 나 이승에서 만날 수는 없고, 봄날은 꽃처럼 눈부신 그대처럼 시방 서럽게 피었다 지고 있네 꽃 진 왕벚나무 잎새 무성해져가고 그 아래 총명한 그대의 붉은 숭결은 전설처럼 이 봄 속 어딘가를 떠돌고 있겠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리운 누님께 -허 균 소낙비 쓸고 간 연못가를 저는 또 서성거립니다 한낮의 해는 다시 뜨겁고 더운 바람에 실려 오는 연꽃 향기는..

카테고리 없음 2024.01.02

이어도 문화의 계승-양금희 역사자료집

양금희 작가, 이어도의 역사와 뿌리를 채록한 '이어도 문화의 계승' 발간 -이어도의 역사적 의미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어도문학회 초대 회장을 지낸 시인이자 칼럼리스트인 양금희 작가의 역사 자료집 '이어도 문화의 계승'이 발간되었다. 제주 국제대학교 특임교수, 뉴제주일보 논설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제주특별자치도 남북교류협력위원, 제주미래연구원 이사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 부회장, 한국시문학문인회 제주지회장을 맡고 있는 양금희 작가는 이어도에 관년하여 누구보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끊임 없이 연구하며 역사적 의미를 만드는 일에 앞장 서 온 전문가이다. 이번에 출간한 '이어도 문화의 계승'도 이런 열정의 순간들이 담긴 영상 채록과정을 생생한 문헌 자료로 기술하게 된 것으로 이어도의 뿌리와 ..

카테고리 없음 2023.12.31

화요일이었고 비는 오지 않았다-이재연 시집

순례자 이재연 입속에서 얼음을 녹인다 어느 때에 두 발이 남루해질 것이라고 돌이 쌓여 있는 좁은 길을 지나간다 새벽 불 켜진 상점을 찾는 일일지라도 너와는 입장이 달라 매번 입장이 달라 연휴에도 흐린 유리창 밖에서 푸른 꽃이 피고 번지는데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어디에서도 흔한 포유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주름이 많은 어미를 바라보며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이 생활 속에 남아 있어 잔물이 불어나는 물가에 서 있다 목이 없는 꽃병 속의 물을 갈아 주며 내가 단지 건물 속에 갇혀 있다면 건물이 우리에게 다정히 속삭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하늘도 알고 있다 홀로 자고 일어난 노인도 알고 있다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조상의 이름을 새긴 돌 위에 사월의 눈 내린다 검불 속에서 머위 잎이 쑥 올라..

카테고리 없음 2023.12.30

다음이라는 말-허림 시집

진창 허 림 오막은 어둠 진창이다 갈잎에 고인 어둠 우수수 바람에 떨어진다 골말 물소리에 흑염소 울음이 흘러나온다 그 속에 고인 어둠 꼭 짜면 먼 하늘 별이 내려와 반짝이겠다 말이 고요해지고 머뭇거리는 시간 위에 캄캄하게 고이는 어둠 창문 너머 강 우는 소리 얼음살이꽃이 피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막의 어둠 진창에도 분분한 봄밤이 그윽해지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버덩말 배나무 집 부강지 앞으로 불 그러내어 밭에서 뚝 꺾어 온 옥씨기 누런 겉잎 벗겨내고 벌건 불 위에 뒤적대며 굽다 보면 저녁도 들어와 슬며시 곁에 앉는다 한 달 전만 해도 밀 보리 쭈질러 먹었는데 고야 몇 개 복상 몇 개 따먹다 보니 옥씨기 철이 와 있다 화전 맛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무슨 낙으로 사나 부강지 앞에 그러낸 불 위에선 옥씨기..

카테고리 없음 2023.12.29

드디어 혼자가 왔다-정진혁 시집

연애의 언어 정진혁 벚꽃의 영역과 물의 영역 사이에 생긴 낙서 같은 것 물가에 서 있는 벚꽃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말을 흔들고 있었다 그날 대성리 물가는 세상의 경계선이었다 밤늦도록 벚나무 아래에서 놀다가 우연히 그것을 건드리고 말았다 벚꽃 물가라는 말이 밀려온다 때때로 남서풍이 부는 물가에 가늠할 수 없는 울림 박각시나비와 휘어지는 강물은 알 수 없는 언어로 허공을 다녀온다 언어 몇 송이가 물 위에 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혼자의 배치 바깥과 안이 완전히 뒤바뀌며 왔다 때마침 밤나무 잎이 서걱거리며 흔들렸다 세상은 잠시 알 수 없는 색채와 공간으로 어른거렸다 드디어 혼자가 왔다 그림자의 등을 보고 있는 나와 마주쳤다 발걸음이 희미해졌다 슬며시 혼자가 왔다 그때 붉은 감이나 하얗게 피어난 국화..

카테고리 없음 2023.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