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에
최지인
고욤나무 그늘 밑
뽀작 다가앉는 햇살
갈래머리 동심, 손가락을 펴 들다
두 조막손에
졸조르르 빛살을 늘어놓고
찡긋거리며 바라본 하늘
이쁜 고 가시내 ---
눈이 부시다
어느 결에 물 한 모금 청해 놓고
머뭇거리던 동자 바람, 남우세스럽게도!
햇살이 사방으로 튀었겠다
박하 잎, 화아한 웃음이 허리를 꺾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랑 초기
같이 앞을 보고 걸으면서도
마음은 늘 네 옆모습을 보다가
가끔씩 발부리에 채인다는 거
비오는 날
일부러 친구한테 우산을 줘 버리고
네 좁은 우산 속으로 뛰어든다는 거
네 잔기침 한 번에
내 목도리와 장갑의 주인이
기꺼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거
우연히 손에 들어온
네가 쓰던 볼펜 한 자루에도
가장 소중한 의미가 실린다는 거
어쩌다 스친 네 손길에
심장이 터질 듯 혹시라도 눈치 챌까
일부러 딴청을 부린다는 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 안의 바다
내 안엔 늘 깊은 바다가 산다
바람이 지운 햇살
하오의 문양으로 일어서는
방파제에 서면
산등성이로 길게 누워있던
수평선이
나의 입덧을 손질하며 헤엄쳐 온다
바다의 깃털에 운신하며
겁 없이 넘나드는 바닷새들이
내 부산한 시름을 물고
자맥질을 한다
어깨를 나란히 한 일몰
그 소실점 사이에서 경계로 있는
정내리 어촌 부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등燈
새끼들
다 흩어지고
당신마저
산에 가서 누우시던 날
행여 찾아올까
기다림은 연년이 깊어질 줄 아시고
연시, 그 붉은 등을
감나무에 달아두고 가셨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삶의 속도를 보다
출근 길
차창 밖으로
버스와 함께 아침을 달리는
자전거 하나
차츰 멀어지다
신호등 앞에서
다시 만난 동그란 여유
버둥거릴수록
삶의 속도는
제 중심을 벗어나지
이 아침,
바퀴살에 걸린
정겨운 여백이 눈부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최지인 시인은 맑은 영혼과 고운 시심을 가진 시인이다. 그의 시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이번 시집을 위하여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해 왔다. 그에게는 참으로 긴 여행이었다.
그 여행은 줄곧 노을을 보며 세월을 끼고 걷는 길이었다. 바람을 맞으며 차례로 앞에 놓이는 강들을 건너는 길이기도 했다. 노을은 그에게 그리움이었고 눈물이었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세월은 아픔인 동시에 길동무였고 바람은 흐름이었고 때로는 위로였으며 생명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강은 그에게 깊이였고 삶이었다.
-이몽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