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이재연
입속에서 얼음을 녹인다
어느 때에 두 발이 남루해질 것이라고
돌이 쌓여 있는 좁은 길을 지나간다
새벽 불 켜진 상점을 찾는 일일지라도
너와는 입장이 달라
매번 입장이 달라
연휴에도 흐린 유리창 밖에서
푸른 꽃이 피고 번지는데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어디에서도 흔한 포유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주름이 많은 어미를 바라보며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이 생활 속에 남아 있어
잔물이 불어나는 물가에 서 있다
목이 없는 꽃병 속의 물을 갈아 주며
내가 단지 건물 속에 갇혀 있다면
건물이 우리에게 다정히 속삭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하늘도 알고 있다
홀로 자고 일어난 노인도 알고 있다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조상의 이름을 새긴 돌 위에 사월의 눈 내린다
검불 속에서 머위 잎이 쑥 올라온다
새벽별 떨어지던 자리에
무거운 수레바퀴 자국을 남기며
곡우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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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은둔
그렇습니다
앞에 가는 사람은 점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날이 어두워서
무서워집니다
저편에서 했던 말이
이편으로 들려오는 데에는
밤이 제격입니다 밤이 맞습니다
누구의 걸음인지 많이 걸어도
저편에 가닿지 않습니다
이편에 왜닿을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저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쯤
나도 무사히 집에 도착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밤의 세계는
화덕의 불처럼 타오르다
의식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참 이상한 날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편지들이 하늘을 덮었습니다
내일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어디선가 다시 만나야 하겠지만
우리의 소멸은 남겨 둬야겠습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완전히 서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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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더 편했다
바람에는 내가 느끼는 것을
너도 느낀다고 생각하는 짙은 예감이 묻어 있어
외투를 벗지 못한 채 외투에 사로잡혀 있다
스스로 고립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올 때까지
번역을 다 하지 못한 측백나무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어두워질수록 바닥을 구르는 바람은 살이 찌고
너를 믿었던 버릇은 사라지지 않아
한낮에도 미나리를 데치며 파란색에 빠져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파란색에 빠져 있다
그것이 더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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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날이 저물어 가는 순간에
우연히 들려왔던 너의 소식과
늘어나는 거리의 맨홀 뚜껑들과
그 뚜껑들을 밟고 지나갈 때 흔들리는 지하 세계의 기분들과
또 차곡차곡 늙어 가는 내 이웃들과 함께
과일 껍질처럼 약해지는 저녁
나는 그들 사이에서 이방인이었지만
아무도 그걸 알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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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춤
들어 봐요 들어 봐요
들판의 작은 씨앗들이 얼마나 천천히 빠르게
대지의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고 있는지
이 오래된 춤을 짊어져야 하는 어머니
대지가 되어 버린 어머니
천천히 식기를 씻는 오늘은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 내려
칸나의 붉은 잔해와 함께 헝클어진 덤불 속에서
방금 식은 태양의 한숨을
찾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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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연의 시집 <화요일이었고 비는 오지 않았다>를 읽는 일은 특정한 시적 상황이나 이미지를 파악하고, 또 새로운 표현 등에 공감하는 일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일상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버텨 내고 있던 우리를 건져 냅니다. 그리고 세상모든 것들에 내재되어 있는 고유의 시간들이 종횡으로 얽혀 가는 교차의 지점으로 안내합니다. 귀를 기울이면 들판의 작은 씨앗들이 춤을 추는 소리들까지 들을 수 있는 곳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시인의 감각을 따라 아주 미세한 것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누리는 아름다운 장면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승원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