및
송병숙
어둠 속에 섬처럼 흔들리는 것들이 있다
제 할 일 하고도 사라지거나 다가오지 못하는
조각조각 부서지는 영상을 본다
디지로그 속 낭만적 거짓 세상에서 '및'이 조각들과 나란히 걸어간다
갓난아기를 업듯 가진 무게를 다 받아줄 수는 없지만
걸치고 나면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및'
사이가 돈독해진 이웃들이 이웃을 부른다
그리고 또 그밖에
뛰어내린 햇살이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에서 그네를 타듯
한 덩어리로 출렁이는 끈끈한 적수들
오늘도 독립을 꿈꾸는 '및'이 모 씨와 모 씨에게 지친 어깨를 내주고 있다
그러고도 그러지 않고도 싶은 저녁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버리지 않아도 되는
대체 공휴일 같은 평화주의지가
결단을 유보한 채 건들거리며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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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 경전
작은 발바닥 하나 움켜쥐었다
하안거를 끝낸 수타사계곡
햇살그물에 걸린
배흘림기둥에 테두리를 입힌 구름무늬 같기도 하고
선자서까래에 새겨 넣은 새발무늬 같기도 하고
대보름날 한지 바른 창에 어른거리던 댓잎의 떨림 같기도 한
추상의 압화는
이름 모를 수생水生이 배밀이로 꾹꾹 눌러쓴
세필 경전
드르륵 딱딱, 드르륵 드르륵
그 깊이를 알 수는 없지만
삐뚤빼뚤 새겨 놓은 물 밑 각자는
혼신을 다한 수양의 굴심 같아서
물고기 한 마리
해살거리는 계곡물에 한 획 한 획
오색단청을 입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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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을 흔드는
헛꽃 피었다
인기척 없는 외딴집
빨랫줄에 펄럭이는 흰 속옷 몇 장
십자가, 면류관, 고상을 새길까 망설이는데
꽃이 대문을 활짝 연다
담장 밖을 향해 외치는 구애의 몸부림
덜꿩나무, 개다래나무, 백당나무 속꽃 숨겨놓고
뜨겁게 펄럭이는 야생의 숲속
봄볕에 취한 벌 나비 떼가
살랑거리는 하얀 나뭇잎이 속꽃인지 헛꽃인지 모르고 늘름거릴 때
여리꾼이 잽싸게 낚아채는 은근한 대낮
헛꽃 피운 산딸나무
은근을 둬흔들고 한 세상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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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도 농담
길을 걷는다
숨 한 번 크게 쉬지 않고 묵묵히
길이 끊어지면
이어가며 걷는다
그의 사랑과 병마와 예술이 불타올라
가슴이 아려오는 건
섣부른 혼자만의 오독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서
사랑에 실패해서
폐병과 늑막염과 치질이 온몸을 괴롭혀서
오히려 격렬하게 솟구쳐 오른 삶
과학도 농담이라며
거침없이 당당하게 살다 간
영원히 늙지 않을
영원히 죽지 않을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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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의 뜰
벌레 먹은 폐 한쪽을 봄볕에 걸어 놓으면
졸음처럼 끈적이는 햇살 혓바닥
깜부기숯도 온기를 잃은 뒷골목엔
사 년째 머슴 사는 봉필네 데릴사위와
제 논 제 벼 몰래 훔쳐내는 응오와
투전 밑천 이 원에 아내를 파는 춘호, 춘호들
닭 잡아 바친 덕만이 가슴에
맹꽁이는 맹꽁 돌멩이를 던지고
춘호 처 등 뒤에서 매미는 하루 종일 매음 자지러지는데
킬킬거리던 명치 끝에 매달리는 돌덩이 하나
들병이가 들고나던 실레마을엔
이제야 말문 터진 동백꽃이
속말을 옹알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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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씨와 모 씨에게>는 이 세계의 진리는 다수이며 그것이 자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직관하는 시집이다.
송병숙 시인은 오직 씀으로써 시 쓰기의 과정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소한 일상사와 인연을 소재로 시를 썼을지라도 그의 시는 애초에 우주적 연결망 안에서 발아한 것이다. 자신을 찾아가는 구법 여행과 자유를 분리하지 않으므로 그의 시 쓰기는 무수한 타자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언어라 할 수 있다.
-김효숙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