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모 씨와 모 씨에게-송병숙 시집

김남권 2024. 1. 9. 10:21



송병숙

어둠 속에 섬처럼 흔들리는 것들이 있다
제 할 일 하고도 사라지거나 다가오지 못하는

조각조각 부서지는 영상을 본다
디지로그 속 낭만적 거짓 세상에서 '및'이 조각들과 나란히 걸어간다
갓난아기를 업듯 가진 무게를 다 받아줄 수는 없지만
걸치고 나면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및'

사이가 돈독해진 이웃들이 이웃을 부른다
그리고 또 그밖에
뛰어내린 햇살이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에서 그네를 타듯
한 덩어리로 출렁이는 끈끈한 적수들

오늘도 독립을 꿈꾸는 '및'이 모 씨와 모 씨에게 지친 어깨를 내주고 있다
그러고도 그러지 않고도 싶은 저녁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버리지 않아도 되는

대체 공휴일 같은 평화주의지가
결단을 유보한 채 건들거리며 걸어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물밑 경전

작은 발바닥 하나 움켜쥐었다
하안거를 끝낸 수타사계곡
햇살그물에 걸린

배흘림기둥에 테두리를 입힌 구름무늬 같기도 하고
선자서까래에 새겨 넣은 새발무늬 같기도 하고
대보름날 한지 바른 창에 어른거리던 댓잎의 떨림 같기도 한
추상의 압화는

이름 모를 수생水生이 배밀이로 꾹꾹 눌러쓴
세필 경전

드르륵 딱딱, 드르륵 드르륵
그 깊이를 알 수는 없지만
삐뚤빼뚤 새겨 놓은 물 밑 각자는
혼신을 다한 수양의 굴심 같아서

물고기 한 마리
해살거리는 계곡물에 한 획 한 획
오색단청을 입히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은근을 흔드는

헛꽃 피었다

인기척 없는 외딴집
빨랫줄에 펄럭이는 흰 속옷 몇 장

십자가, 면류관, 고상을 새길까 망설이는데
꽃이 대문을 활짝 연다

담장 밖을 향해 외치는 구애의 몸부림

덜꿩나무, 개다래나무, 백당나무 속꽃 숨겨놓고
뜨겁게 펄럭이는 야생의 숲속

봄볕에 취한 벌 나비 떼가
살랑거리는 하얀 나뭇잎이 속꽃인지 헛꽃인지 모르고 늘름거릴 때
여리꾼이 잽싸게 낚아채는 은근한 대낮

헛꽃 피운 산딸나무
은근을 둬흔들고 한 세상을 연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과학도 농담

길을 걷는다
숨 한 번 크게 쉬지 않고 묵묵히
길이 끊어지면
이어가며 걷는다

그의 사랑과 병마와 예술이 불타올라

가슴이 아려오는 건
섣부른 혼자만의 오독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서
사랑에 실패해서
폐병과 늑막염과 치질이 온몸을 괴롭혀서
오히려 격렬하게 솟구쳐 오른 삶
과학도 농담이라며
거침없이 당당하게 살다 간

영원히 늙지 않을
영원히 죽지 않을 김유정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유정의 뜰

벌레 먹은 폐 한쪽을 봄볕에 걸어 놓으면
졸음처럼 끈적이는 햇살 혓바닥

깜부기숯도 온기를 잃은 뒷골목엔
사 년째 머슴 사는 봉필네 데릴사위와
제 논 제 벼 몰래 훔쳐내는 응오와
투전 밑천 이 원에 아내를 파는 춘호, 춘호들

닭 잡아 바친 덕만이 가슴에
맹꽁이는 맹꽁 돌멩이를 던지고
춘호 처 등 뒤에서 매미는 하루 종일 매음 자지러지는데

킬킬거리던 명치 끝에 매달리는 돌덩이 하나

들병이가 들고나던 실레마을엔
이제야 말문 터진 동백꽃이
속말을 옹알거리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모 씨와 모 씨에게>는 이 세계의 진리는 다수이며 그것이 자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직관하는 시집이다.
송병숙 시인은 오직 씀으로써 시 쓰기의 과정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소한 일상사와 인연을 소재로 시를 썼을지라도 그의 시는 애초에 우주적 연결망 안에서 발아한 것이다. 자신을 찾아가는 구법 여행과 자유를 분리하지 않으므로 그의 시 쓰기는 무수한 타자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언어라 할 수 있다.
-김효숙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