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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시집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 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

카테고리 없음 2023.05.15

일요일의 화가 8요일의 시인-유정남 시집

소금꽃 유정남 뭍으로 건너온 바다는 폭염 속에 몸을 맡기고 화두를 건진다 갯벌의 수로를 지나올 때는 젊은 날의 부유물들이 등짐처럼 따라왔다 방향도 모른 채 심해를 유영하다 찢어진 지느러미들, 바람을 다그치던 파도의 높이를 잠재우느라 밤이면 신열을 앓기도 했다 바다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느라 뼈를 드러낸 어깨의 늙은 염부가 구릿빛 땀방울을 떨군다 수평으로만 이어지는 염전에는 한 뼘의 그늘도 햇볕에 녹고, 쓰라린 언어의 자모들도 갯바람에 묻어 하나씩 증발되어간다 별꽃 뜨고 지는 몇 생을 지나 수면의 흔들림이 모두 사라지면 끝없이 나를 비워내 온 시간의 결정들, 하얗게 풍화된 뼈로 눈물꽃이 되리라 거울 속에 눈부시게 정제된 별들을 쓸어모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피카츄를 뽑다 불 꺼진 도서관을 나와..

카테고리 없음 2023.05.11

네거리를 건너가는 산-정안덕 시집

눈 오는 밤 정안덕 몸조차 털지 않고 은둔하는 나뭇가지에 걸린 꼬마 전등 몇 개, 눈을 비비며 눈을 뜬다 치맛자락 움켜쥔 검은 눈동자 흐려지던 날 밤을 새워 길쌈하던 엄마 하얀 동그라미를 그리며 창문을 두드리고 눈의 목소리를 듣는 귀는 창밖으로 차갑게 길어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족 나를 넘기면 네가 있다 엄마는 말했다 이번만 잘 넘기면 괜찮을 거라고 아빠의 눈동자는 수 없이 페이지를 넘겼고 우리들은 자신의 페이지에 들어앉아 꼼짝할 수 없었다 엄마는 계절마다 이번만 넘기면, 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아빠의 눈은 번뜩였다 우리는 저마다의 허들을 갖고 있다 어디에나 비탈진 고갯길은 있다 내가 너를 넘고 네가 나를 넘듯이 그것은 다 함께 어깨를 두르는 일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딸 살아갈수록 엄마..

카테고리 없음 2023.05.06

그러니까 너야-김어진 시집

그러니까 너야 ㆍ1 -내 삶에 겨울이 오면 김어진 내 삶의 겨울이 오면 나에게 무얼 물어보게 될까 생각 중입니다 내 삶에 겨울이 오면 나에게 자연을 사량했냐 물을 겁니다 내 삶에 겨울이 오면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냐 물을 겁니다 내 삶에 겨울이 오면 자연스럽게 답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사랑하겠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러니까 너야 ㆍ8 -인연 석바위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이 은행나무도 옆 수컷 은행나무의 사랑을 먹으며 살았다 언제부턴가 암컷 은행나무가 몸부림을 쳐대곤 하였다 극심한 통증으로 동공이 확장되며 땀을 흘리기도 했다 병이 깊었지만 누울 수 없어 선 채로 말라가고 있었다 봄이 오자 구청 직원들이 다 죽은 은행나무 밑을 잘랐다 은행나무 자른 자리에 바람들이 문상을 드..

카테고리 없음 2023.05.04

미시령-김 림 시집

콩밭 너머 김 림 콩밭 매러 간 서방님 오십 년째 그 세월 끌어안은 새댁머리엔 어느새 무성한 거리 콩밭엔 그저 눈길만 보낼 일이지 그도 아니면 마음만 아예 신 벗고 콩밭 매러 가신 날 오십 년째 울타리 너머 잡초밭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전쟁놀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 햇볕 아래 빛나는 사금파리 무기로 전쟁놀이가 한창이다 금단의 선을 범하면 명쾌하게 내려지는 사망선고 "야, 너 죽었어." 죽었다는 말이 이리도 명랑한 말이었나 머리를 긁적이며 죽은 아이가 웃는다 지나간 것들은 동글동글 모서리가 닳아져 있게 마련 조막만 한 손바닥이 지구를 훑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홍어무침 열여섯 살 겨울 성탄절 전야 주소도 없이 한두 번 엄마 손에 이끌려 갔던 외삼촌 집에 엄마의 부음을 전하러 간다 구로동 ..

카테고리 없음 2023.05.03

중얼거리는 사람-정병근 시집

중얼거리는 사람 정병근 부유음浮遊音 한 소절이 종일 뇌리에 붙어 다닌다 그것은 끓고 있는 죽 같고 뚜껑 없는 냄비 같다 다 퍼낸 바닥에 고이는 물처럼 사람을 만나면 안녕하세요가 툭 튀어나온다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다음을 기약하는 말끝에 속말이 따라붙는다 쳐다보는 표정 뒤로 눈이 숨는다 너의 말을 내놔라 말이 있어요 할 말이 있어요 몸 안에 말이 있다고 눈을 껌벅이며 울먹이던 사람을 보았다 가지가 몽땅 잘린 나무둥치의 옆구리를 뚫고 툭 튀어나오는 꽃처럼 목구멍을 기어 나오는 선충들처럼 잘린 곳에 실가지가 무수히 뻗어 나온다 다 게우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는 말의 뒤통수에 미운 말이 들끓는다 곡을 끝낸 상주는 한 번씩 음, 음, 하고 자신의 목청을 확인한다 말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 죽은 몸..

카테고리 없음 2023.05.02

돌고 돌아 흐르는 강물처럼 '하회마을'

시간을 걷는 이야기, '돌고 돌아 흐르는 하회마을' 이라는 그림책이 나왔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김유경 작가는 '바람의 맛'이라는 그림책을 만들었고 '아름다운 우리 한옥', '엄마의 김치수첩' 등에 그림을 그렸다. 김유경 작가는 이 책을 만들기 위해 하회마을에 직접 가서 머물면서 하회마을 사람들의 향기를 담아왔습니다. 하회마을에 가기 전에는 그곳이 왜 그렇게까지 좋은지 까닭을 몰랐습니다. 하루 내내 골목골목을 마음 가는 대로 걷다 알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절절 끓는 아랫목에 누워 창호지 바른 문을 열어 보고야 알았습니다. 쪽마루에 서서 기지개를 펴다 날갯짓이 바쁜 제비와 눈을 마주치고서 알았습니다. 오래된 빛깔,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600여 년의 몇 분의 몇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시간을 살..

카테고리 없음 2023.05.01

정병근 시인의 시토크

정병근 시인의 詩토크에 다녀왔다 4월 29일 오후5시, 노원역 은근의 '책방 봄'에서 책방지기 송영신 씨가 진행하는 북 토크엔 시인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였다. 정병근 시인은 1988년 불교문예, 200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시집으로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태양의 족보', '눈과 도끼'등 네 권의 시집을 내고 이번에 다섯번 째 시집 '중얼거리는 사람'을 출간했다. 끊이없이 새로운 말을 발견하고 사람을 발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정병근 시인의 언어가 시의 행간을 가득채우고 또 새로운 말이 되어 독자들에게 오롯하게 전달되는 시간이었다. 참석자들이 자기 자리에서 좋아 하는 시를 낭독하고 질문과 대답을 하며, 시인의 말 한 마디에 귀기울여 마음을 담는 모습들이 인상..

카테고리 없음 202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