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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거리를 건너가는 산-정안덕 시집

김남권 2023. 5. 6. 08:10

눈 오는 밤

정안덕

몸조차 털지 않고 은둔하는 나뭇가지에 걸린

꼬마 전등 몇 개, 눈을 비비며 눈을 뜬다

치맛자락 움켜쥔 검은 눈동자 흐려지던 날

밤을 새워 길쌈하던 엄마

하얀 동그라미를 그리며 창문을 두드리고

눈의 목소리를 듣는 귀는

창밖으로 차갑게 길어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족


나를 넘기면 네가 있다

엄마는 말했다
이번만 잘 넘기면 괜찮을 거라고

아빠의 눈동자는
수 없이 페이지를 넘겼고

우리들은 자신의 페이지에
들어앉아 꼼짝할 수 없었다

엄마는 계절마다 이번만 넘기면, 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아빠의 눈은 번뜩였다

우리는
저마다의 허들을 갖고 있다

어디에나 비탈진 고갯길은 있다

내가 너를 넘고 네가 나를 넘듯이
그것은 다 함께 어깨를 두르는 일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살아갈수록 엄마한테 미안해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한 아이를 키울 때는 몰랐는데

아들 둘을 키우다 보니

엄마 생각에 새록새록 가슴이 미어져

아니, 벌써

그래도 너희들 키울 때가 좋았더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상강霜降


내 안의 망치 두드리는 소리에
비둘기 거울 밖으로 날고

시계視界 안으로
검은 구름이 번진다

나무에 바람이 일고 가을은 깊은데

길 없는 길
낙엽 한 잎, 툭 떨어져 뒹굴고

창문의 표정은 마름모꼴
언뜻, 목소리를 감춘 허공

사르륵사르륵
햇볕 스며든 감나무 허리에 가을이 붉게 걸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혜윰


사월, 씀바귀꽃 무리 지어 노랗고
하늘은 울먹울먹

내 안의 돌조차 흔들리는
기억의 메스꺼움

사그랑이가 된 엄마의 미소를 따라 흩날리는
푸슬푸슬한 송홧가루

봄의 화첩 속
깊은 눈
여기저기 쫑긋거리는 봄으로 돋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정안덕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암울했던 한국 근현대사, 격동의 시대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할당된 삶의 무게를 운명으로 짊어지고 그런 변화에 능동적으로 살아낸 한 개인의 당당함과 의연함의 시적 형상을 본다. 민족 대다수가 겪어야 했던 극도의 궁핍과 사회적으로 불안정했던 6,70년대 배고픔과 가난이 일상적이었던 삶은 말로 개관하기는 쉬워도 살아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혹자들은 정안덕 시인이 겪은 인생의 역정은 지금의 70대에 이른 대다수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삶의 양태라고들 말하지만 그처럼 다시 공부하고 더욱이 전문 문인으로 당당히 서기는 어렵다. 그렇게 산 사람들이 모두 이른바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거기에 더하여 글을 쓰고 시집을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에게 이번 시집이 가장 인상적인 점은 아직도 그에게는 당대의 젊은 시인들 못지않은 열정과 패기 그리고 시적 모험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강형철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