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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리는 사람-정병근 시집

김남권 2023. 5. 2. 06:55

중얼거리는 사람

정병근

부유음浮遊音 한 소절이 종일 뇌리에 붙어 다닌다
그것은 끓고 있는 죽 같고 뚜껑 없는 냄비 같다

다 퍼낸 바닥에 고이는 물처럼
사람을 만나면 안녕하세요가 툭 튀어나온다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다음을 기약하는 말끝에 속말이 따라붙는다

쳐다보는 표정 뒤로 눈이 숨는다
너의 말을 내놔라
말이 있어요 할 말이 있어요
몸 안에 말이 있다고 눈을 껌벅이며
울먹이던 사람을 보았다

가지가 몽땅 잘린 나무둥치의 옆구리를 뚫고
툭 튀어나오는 꽃처럼
목구멍을 기어 나오는 선충들처럼
잘린 곳에 실가지가 무수히 뻗어 나온다

다 게우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는
말의 뒤통수에 미운 말이 들끓는다

곡을 끝낸 상주는 한 번씩
음, 음, 하고 자신의 목청을 확인한다
말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

죽은 몸에서 나온 벌레들이
사방으로 빠르게 흩어지며 사라진다
그 많던 말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는 동안 다시 말이 고이기 시작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자귀나무 여자


눈썹도 없이,
온 얼굴이 속눈썹인 여자를 보았네
눈을 감고, 저녁의 이내 새벽의 안개가
속눈썹 갈피갈피 슬어놓은
알들을 부화시키고 있었네

더 가까이 가자,
어떤 친절도 없이 툭툭 던지는 여자의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
설핏설핏 바람에 묻은 냄새는
생전 맡아보지 못한 냄새

이 세상에서는 안 될 법한
낯선 확신으로 혼자 섬섬한 그 여자
긴 속눈썹에 꿀을 바르고
누구를 기다리는가

밤이 오면 기꺼이 꿇어앉아
여자가 따르는 술잔을 받아야 하리
길고 붉은 속눈썹을 열어야 하리

눈동자 없는 눈초리를 보았네
얼굴 없는 속눈썹을 빳빳하게 세우고
욕 같은 말을 허공에 중얼대고 있었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칼집


칼을 감춘 표정이 저럴까
입을 연 지 백 년은 된 듯
일자 입술 주위에 검자줏빛 녹이 슬었다

거미줄 같은 주름들이
얼굴에 萬波를 이루었다

인사하며 길을 묻는 내게
너의 말은 무엇이냐
되묻는 듯 쏘아보는 눈빛

조금 기다리자
노인의 눈썹이 떨리고
"끄렁!"
칼이 나오는 소리

"어딜 간다고?"
노인이 이를 보이며 배시시 웃는다
칼은 짧고 보잘것 없다

다시 입을 다문
노인이 나를 꿰뚫어 본다
갸릉갸릉 칼 우는 소리가 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숙주론


라면이 다 익으면 불을 끄고 이것을 넣는다. 아싹거리는 맛이 좋다. 월남국수에 넣어 먹기도 하는 숙주나물 이야기다.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곤룡포가 덮여 있었다. 후에 곤룡포 주인의 손자를 죽이는 데 앞장서고 새 왕에 붙어먹은 신숙주 이야기다.

반지하에 사는 가족들이 부잣집 세간을 야금야금 파먹는다. 그 집 지하에는 천년 묵은 귀신이 산다. 영화 기생충 이야기다.

이로부터 청루에 발을 끊고, 십 년을 바쳐 한 남자를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결한 기생 일타홍 이야기다.

헛구역질이 잦았고, 방앗간 기름내가 까무러치게 좋아서 가끔 항문으로 뾰족한 입을 내밀던 회충 이야기다.

자궁에서 나온 아기가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獨尊, 평생 빌어 드신 부처 이야기다.

宿을 붙어먹은 숙이라는 이름이 떠오르고, 主는 나를 거둬 먹이는 모든 주인, 머물며 묵고 갈 내 宿의 주인 이야기다.

밥을 챙겨다오, 조율이시 어동육서, 내 기억에 깃들어 사는 아버지 이야기다.

혼자 있는 것이 없다. 박토에 뿌리내린 나무조차!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쓴 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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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살림


아침나절에 아내가 없어졌다
화장실에도 없고 베란다에도 없다
냉장고와 세탁기를 다 열어보았다
방금까지 도마 소리가 들렸는데
핸드폰도 꽂혀있고
텔레비전도 켜져 있다
계란 삶는 가스 불도 켜놓질 않았나!
흔적이 남긴 고요가 무섭다
삼십 분이 지나도
한 시간이 지나도
없다 이 여자가,
대체 어딜 갔단 말인가
베란다 창문을 열어보고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해보는데
아내가 쑥 들어왔다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도마질하다가 베였단다
나를 부르려다가 그냥 갔단다
피 나는 손기락을 꼭 잡고 혼자 갔단다
세상에 의지할 데 없는 사람처럼
고아처럼 이내가 불쌍해서
썰다 만 감자도 썰어주고
그릇 씻는 일을 조금 거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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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직업인 시인들은 말 때문에 무수한 고초를 겪는다. 그들에겐 말이 축복이고, 웬수이며, 저주이고, 절망이다. 시인은 말에 매혹당한 말의 노예이다. 시인은 말에 진저리를 치면서 말의 주술에 사로잡힌 자이다. 시인에게 말은 가학과 피학의 채찍이다. 말의 신전에서 말에게 무릎 꿇고 말의 제사장이 될 때, 시인은 말의 나팔이 된다. 말은 시인의 소리통을 울려 자신을 온전히 성취한다. 시집에서 정병근의 화두는 단연코 말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