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너야 ㆍ1
-내 삶에 겨울이 오면
김어진
내 삶의 겨울이 오면 나에게 무얼 물어보게 될까 생각 중입니다
내 삶에 겨울이 오면 나에게 자연을 사량했냐 물을 겁니다
내 삶에 겨울이 오면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냐 물을 겁니다
내 삶에 겨울이 오면 자연스럽게 답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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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너야 ㆍ8
-인연
석바위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이 은행나무도 옆 수컷 은행나무의 사랑을 먹으며 살았다 언제부턴가 암컷 은행나무가 몸부림을 쳐대곤 하였다 극심한 통증으로 동공이 확장되며 땀을 흘리기도 했다
병이 깊었지만 누울 수 없어 선 채로 말라가고 있었다 봄이 오자 구청 직원들이 다 죽은 은행나무 밑을 잘랐다 은행나무 자른 자리에 바람들이 문상을 드리고 떠난다 만남도 인연, 헤어짐도 인연, 머무는 것도 인연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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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너야 ㆍ20
-술
칠월 두 번째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다 신선하기 짝이 없는 첫걸음이 사뿐하다 친구가 오늘 바쁘신가 술시계줄 같이 차자고 연락이 왔다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온 세상 집어 삼킬 것 같은 날이다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세상을 주승酒乘이라 한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흐르는 술은 꽃이요 꿀이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음식은 술이요
인간이 만든 최악의 음식도 술이다
최고와 최악의 경계에 서 있는 당신은 강하다 보이지 않는 곳을 꿈꾸는데 강 건너면 술 익는 마을이 나오고, 당신은 술을 다스리게 되는 직관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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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너야 ㆍ50
-세월
누가 세월이 빠르다 하는가
삼 일만 굶어 봐라
누가 세월이 느리다 하는가
삼 일만 사랑해 봐라
빠름과 느림 사이에서 주문이 전설을 기다리고,
전설이 통념에서 나와 통념을 통렬하게 깨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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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너야 ㆍ91
-혀
저것이 동굴 천장 벽에 붙었다 떨어지면 말이 된다
음식을 먹을 때 보드라운 저것이 침을 흘리며 춤을 춘다
술 마시고 저것이 취해 꼬부라져 비틀비틀 걸어간다
저것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 생각해 본 적 있다
너에게 키스와 밀어도 속삭이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저것은 슬프거나 아름답게 무시무시한 입속의 도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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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진 시인의 시집 도처에 출몰하는 자연과 사람과 그리고 저마다 이어지는 관계의 모습에서도 진실에 닿고자 하는 간절함은 간절함을 넘어선 어떤 지점을 향해 간다. 시인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교차하는 곳에서 타자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협심보다는 자신의 내부 고발로 파고 드는 구체적인 필법을 구사한다. 산수 간에 절로 흘러가는 시간의 필법을 담담하게 종이 위에 받아 적는 방식으로 표면의 화려함 보다는 깊이를 향한 부단한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무엇을 숨기거나 감추려는 애매나 모호함을 벗어나서 단순과 솔직을 무기로 삼아 사건과 관찰만으로도 시가 되는 지평을 열어보인다. 그것은 단순한 방법으로 세상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세잔의 시선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세상을 가장 단순한 세모와 원통과 원뿔의 기호 속에서 오로지 색감으로 원근과 깊이를 나타내려고 애를 썼던 세잔의 작업처럼 김어진의 시작업 또한 이와 유사하다.
봄이면 봄의 모습을 단순한 방법으로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겨울이면 겨울의 모습 그대로, 슬픔과 기쁨의 모습도 직정적인 듯 하면서도 단순한 깊이로 언어를 부린다. 그것은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이나 서사를 평행한 선의 넓이와 수직선의 단순한 깊이를 구사하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오늘의 현실 그리고 당신의 오늘을 생각하게 하는 여지를 남겨두는 입체를 허용한다.
-손현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