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 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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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혼자라는 건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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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르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계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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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까이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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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출간된 최영미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다시 읽는다.
몇 년전에 다시 읽고 원주의 작은 독립서점에서 최영미 시인과의 작가와의 만남시간에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다시 시집을 만났다.
순수하고 뜨겁고 열정적인 영혼을 다시 만난다.
시가 심장을 뎁히고 세상 밖으로 나와야 누군가의 가슴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조금도 솔직하고 뜨거워져야 누군가의 가슴도 뜨겁게 뎁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도 혁명이다.
혁명을 할 자신이 없으면 사랑도 시작하지 말고
시도 쓰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