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나의 관계
류 흔
믿어주실지 모르지만
나는 나무와 연애를 한다
어둔 숲에서
지조 높은 한 나무를 골라
몸통을 끌어안고 애무한다
과정 중에 나무가 표현을 하지 않는 점이
나는 늘 불만이지만
절정의 순간에 그가 흘리는 수액이
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안다
은밀히 한다고는 하는데
울지 않는 새가 지척에서 지켜볼 때도 있다
우리는 깊이 사랑해서
그런 불편쯤 개의치 않는다
다시 한번 고백하건대
나는 나무와 연애를 한다
솔직히 나무의 진심을 들은 바 없으나
나무와 나는 참으로 거시기한
그런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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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코발트블루 빛깔
광장에
방금 찧은 쌀 한 섬
툭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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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마당에 낙엽이 떨어져있다
가을이니까 그렇다
쓸쓸했다
빗자루를 가져와 쓸어야 할까
낙엽을 쓸면
쓸쓸까지 쓸어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가을은 원래 쓸쓸한 법
법을 어기면 안 되지
낙엽을 두기로 한다
저 낙엽도 가지에서 뛰어내릴 때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놓고
얼마나 망설였을까
그런 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나는 눈물마저 뛰어내릴까 봐
얼른 손등으로 받쳐주고 나서
팔랑거리며 방금 내려와 가슴께 붙은
자줏빛 잎을 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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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선에 고래가 산다
30분 넘게 잠영을 하던
고래가 숨을 쉬러 박차 오른다
힐끗, 보라매 카센터 간판을 본 것도 같은데
신대방이다
고래 본인 입장에선
신대륙이어야 폼 날 텐데 신대방이라니
이 노선에는 신촌이 있고 신천이 있고 신림도 있지
신도림이 있고 신당이 있고 신답이 있지
마지막으로 신설동이 있는데 그건 최근에 신설된 역일 것이다
신字돌림 문중을 주유하는 고래여
잠실에는 누에를 뱉어놓고 사라진 고래여
들리는 족족 인어 떼를 삼켰다가
틈틈이 게워내는 고래여
너의 해적인 내가 오늘은 술이 과하거나
나는 뚝섬에 내려서 보물을 숨길 테니
너는 또 어느 항구를 찾아가거라
넉넉한
오늘밤은 달이 두 개로구나
고래고래 불러보는
고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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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떼가 있는 황혼녘에
어느 저녁에,
모텔이 보이는 그런
저녁에
새들이 폭력배처럼
몰려다닌다
나는 이런 저녁이 좋다 정말
좋다
모텔의 어느 창이
주름을 펴면서
커튼이 옆으로 흐르는 것을 보았다
부러우면
진다
몰려갔던
새들이
다시 몰려왔다
그들에게
내 볼에는
붉은 노을이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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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류흔 시인이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에 전존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대부분을 걸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거대한 책략이 322편에 이르는 시를 한 편도 뺄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고 시집의 디자인부터 글자의 포인트며 글자체까지 일일이 관여하게 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그런 것들이 받아들여졌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이 시집에 거는 기대만큼은 또렷하고 분명하다.
로마의 황제 네로는 폭군으로도 유명하지만 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져있다. 오죽하면 로마를 불바다로 만든 것도 시를 쓰기 위해서라는 확인되기 어려운 이야기까지 널리 퍼져있겠는가. 그런 황제도 시의 청중들 앞에서는 겸손했다. 그가 참여한 시 경연대회의 심사자들 앞에서는 두려워하며 떨었다.
조바심을 가지고 심사 결과를 기다렸다.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를 세상에 내어놓은 류흔 시인의 심정이 그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제국에서 십여 년간 축조한 시들에 대해 과연 심사위원들은 이 시집에 어떤 판정을 내릴 것인가? 지금은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를 읽을 때이다.
-한명희 시인 강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