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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52-이선정 시집

김남권 2023. 1. 2. 09:28

귤의 장례식

이선정

귤이 죽었다

차에 두었던 귤 하나가
밤새 꽁꽁 얼어 죽었다

소통을 거부한 시인의 시집처럼
소통을 거부당한 독자의 죽음처럼

한때 주홍을 자랑하던
딱딱하게 죽은 귤 하나
따뜻한 아랫목에 모셔 3일장을 치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판정을 거부한다


독자의 등급은 눈동자에 새긴다는데
이상적 독자
최적의 독자
교육받은 독자
정통한 독자가 판정을 기다린다

시인도 A급이냐 B급이냐 F급이냐
저울 질해가며 등급을 매긴다는데

부모도 상급이냐 중급이냐 하급이냐
지랄 같은 세상의 등급을 하사받고

킥킥, 마블링 좋네
도살장에서 난도질 당해
종국에는 엎어져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서도 판정을 기다리는

'꽝' 찍힐 낙인 앞에
얌전히 등을 내밀고 나란히 줄 세워진 것들
저 가벼운 팔목을 비틀지도 못하고

인생아!
어쩜, 공손하기도 하여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술푸다


중등 교과서에 시가 실린
어느 시인이 술을 판다

하기사, 아이들이
시詩를 받아먹지
술酒을 받아먹나

술을 팔아야 밥을 먹는데
시를 팔아 밥 못 먹는
시인이 술푸다

술푸다가 슬퍼서
술푸다 술푸다 시를 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밑줄에 연대하다


중고시장 뒤져 품절된 시집을 겨우 구했다

상태 상급이라더니 첫 번째 시에서 벌써 밑줄,
그 밑줄에 발목 잡혀 더 나아가지 못한다
밑줄로 이어진 낯모를 이와의 끈끈한 연대
문장 아래 조아리고 참회했을 그의 고뇌와 손잡고
나는, 묵도한다

이래서는 안 되지만 이러기도 하였지
죄를 고하며 함께 기도하는 낯선 이의 손
동질감 어린 밑줄을 덧대고 덧대며
거기서, 운다

모르는 이여 묻겠네
자네를 밑줄 그은 오래된 문장을 기억하는가?

'수십 번도 더 내가 살해하고 용서했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래, 52


고래가 이해되기 시작한 건 슬픈 일이야
쓰고 또 쓰고
지우고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바다는 무한해
무한하다는 말은 왜 슬프지?
용솟음치든 꼬물거리든 자빠지든 무릎이 깨지든
어찌하든, 쓴다

대왕고래 청고래 향고래 범고래 혹부리고래
브라이드고래 아르누부고래 피그마부리고래
허브부리고래 부리고래부리고래

꿈틀거린다, 휘젓는다, 내달린다, 난다, 움츠린다,
기진맥진한다, 베인다, 잠수한다, 숨통이 조인다,
베인다, 바다에 베인다, 놓지 못한다, 그냥 베인다

고래가 점점 사라지는 건 바다가 무한하기 때문이야
무한한 바다의 갈퀴에 질식당하기 때문

어느 구멍이든 파보면
오래전 사라졌던 눈이 퀭한 고래가
부리고래부리고래 자신을 벤 바다를 꿰매고 있을 거야

고래가 닿지 못하는 소리 저 너머의 바다
가장 신선하고 난해한 바다를 입에 문
슬픈 52Hz를 꿈꾸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선정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대단히 특이하게도 시와 시인과 문단에 대한 촌철살인의 단검 던지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나같이 위트와 풍자, 해학이 넘쳐난다. 한 권 시집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읽는 내내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때때로 그 미소는 쓴웃음으로 바뀐다. 이 휘황찬란한 시대에 문학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외화내빈이 심한 우리 문단의 어둑어둑한 풍경도 그렇지만 최첨단 전자기기와 영상문화가 활자의 위축을 가져온 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왜 시가 필요한지, 왜 시인이 존재해야 하는지, 시종일관 날카로운 목소리로 역설하고 있다. 시인은 그 시대와 불화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역설적으로 말하는 시인, 그의 이름은 동해에 출몰하는 대왕고래처럼 박력이 있는 시인 이선정이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 교수

동해를 끼고 사는 이선정 시인은 나의 SNS 친구다. 등단은 남해를 베고 자는 내가 어찌어찌 앞섰지만 SNS에서는 그가 上手다. 이른바 팬덤이나 조회 수를 보면 시인은 동해 고래급이고 나는 남해안 납작납작 엎드린 새끼 도다리쯤 되려나 싶다. 차에 실어둔 귤 하나가 얼자 따뜻한 아랫목에 모셔 3일장을 치르는 따뜻한 시인이고, 옳은 길을 가지 않는 시인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입속에 감추지 않는 엄격한 시인이다. 그래서 이번 시집에 시와 시인에 대한 애정과 지적이 많다. 이번 시집에 내가 먼저 쓴 적이 있는 고래, 52가 실려있다.  우리는 같은 소재를 노래했지만 내가 고래 소리에 집착할 때 시인은 고래가 닿지 못하는 소리 저 너머의 바다와 가장 신선하고 난해한 바다를 보는 시인이다. 동해다운 넓이와 깊이가 부럽다.
-정일근 시인 경남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