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나무 두 개
이창호
절룩절룩
묶은 줄이 풀어지고
달랑달랑
맨 줄이 떨어지고
왜 젊은 날엔 무심했던가
가까이 내 몸 안에 이루어지는
이 커다란 일을
조심하고 조심했을 터인데
오호, 무릎 관절을 아파 본 사람은 안다
통나무 둘 이어 놓은 것이 다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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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훌라
이용하
이 시대는 너를 부러워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 집을 버릴 수 없으니
부처가 되긴 글렀다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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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겼다
이영신
해님이 산등성이에 다다르자
연화봉과 구름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연화봉은 해님을 머리에 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구름은 꽉 붙들고 절대로 놓지 않으려고 한다
둘 사이에 끼어서 해님은 점점 애가 탄다
숲도 산짐승들도 넋을 놓고 구경만 하고 있다
당기고 밀던 사이에 미끄덩, 빠져나가
해님이 하늘로 높이 달아났다
이래저래, 구름이나 연화봉이나 힘이 부친다
오늘은 비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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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산
석연경
비밀의 안개가 두터울 때
몽롱을 짊어진 새벽 숲에서
태풍에 사라졌던 열쇠가
잃어버린 봄날의 산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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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박분필
비 온 뒤 보도블록에 지렁이들이
온몸을 붓 삼아 상형문자를 기록한다
쓰다가 발에 깔려 문질러진 놈
토막토막 여며지건 말건 기어가는 놈
햇살 쪼이면 순식간에 미라가 되고 말 걸
오로지 죽음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저 봄날의 장렬한 육박전 같은 몸부림은
화려한 사육제 같은 저 몸부림은 누구더러
아서라, 과연 누구더러 읽으라는
아득하고 까마득한 메시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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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라궁
-티베트 라싸의 홍궁 백궁
고영섭
바다같이 깊고 하늘같이 높은 이
관음보살의 화신이 머무는 백궁
주인을 잃은 채 언덕 위에 서서
터엉 빈 대좌를 비추는 홍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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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의 두께를 두텁게 하고 깊이를 더하고자 하는 현대향가 동인들은 향가의 본래 기능을 깊이 새겨 고대의 가사 현대의 가사속에 담아 내고자 한다. 각자의 시를 좀 더 정성스럽게 갈고 문질러 천지 귀신을 감동시키는 향가시를 쓸 것을 다짐해 본다. 고대 시가의 장점을 현대 시가의 장점으로 계승하고 현대 시가의 장점을 고대 시가의 강점으로 접목해 보고자 한다. 나아가 같이 부르는. 다함께 부를 수 있는 떼창으로 승화시켜 보고자 한다.
-고영섭의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