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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부족하다-이 은 시집

언니, 우리 물류창고에서 만나요 이 은 창고가 보이면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그것이 창고에 대한 예의니까요 어제는 S푸드, 훈제된 고깃덩어리들을 포장했어요 그제는 올포유, 당신을 위해 사정없이 옷을 갰어요 하마터면 옷에 깔려 죽는 줄 알았어요 오늘은 아이스크림 공장, 우주선이 희미한 빛을 내며 지나가요 떨어지는 것들은 모두 속도가 됩니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는 얼음이 쏟아져요 얼어붙은 손가락이 비명을 질러요 손가락은 가만히 둔 채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려요 빵과 빵 사이 너무 많은 눈보라, 빵또아에 끼어 있는 손가락이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설렘의 구멍에 얼음을 가득 채워요 설렘과 설렘 사이 너무 많은 눈보라, 꼿꼿이 서서 눈보라를 맞고 있는 설렘, 재빠르게 히말라야산맥의 눈을 퍼담아요 몸속에 가득한 눈보라, 왈칵..

카테고리 없음 2024.06.05

어쩌자고 나는 자꾸자꾸-손준호 시집

보약 손준호 할매국밥집에서 홀로 술국 먹은 새벽 취기 털고 일어서는데 '보약 달이는 심정으로 정성껏 끓였습니다' 플래카드와 눈 맞아 힘을 내 다시 남은 국물을 훌훌 긁어 마시고 남은 소주도 탈탈 털어 마셨다 생은 가끔 소주보다 독하고 술국보다 뜨겁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순산 저물녘 기어 나온 땅거미처럼 노파가 허릴 낮춰 포도를 따고 있다 톡, 포도나무가 탯줄을 끊자 첫 아이를 받아 안듯이 두 손으로 조심조심히 거룩한 순교자들을 건네받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홍시분계선 옆집 감나무 가지가 담 넘어 마당에 축 쳐져 내려옵니다 홍시를 주렁주렁 달고서 경계를 넘어버린 가지들 사람이나, 나무나 자식들은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일까 군사분계선 넘으면 우리 거 아이가! 노모가 환갑 넘은 맏이에게 농을..

카테고리 없음 2024.06.04

제3회 문덕수전국시낭송대회

제3회 문덕수전국시낭송대회 겸 제66회 시문학 시낭송회가 6월 1일 오후3시, 서울 종로3가 한국인성개발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김필영 시인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한국시문학문인회 김남권 회장의 환영사에 이어서 한국문인협회 강정화 부이사장의 축사를 듣고 시낭송대회 본선 경연이 시작되었다. 전국 17개 시도에서 온라인 예심에 참여한 백 여명 중 15명이 최종 본선에 올라 경합을 벌인 이번 행사는 지정시로 문덕수 시인의 시 한편과 자유시 한편을 낭송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올해 대회는 특별히 20대 젊은 참가자들이 대거 참여 하여 시낭송의 미래를 밝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남 전북 경남 경북 대전 경기 강원 부산 서울 인천 울산 등 전국 각지에서 골고루 참여하여 대회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카테고리 없음 2024.06.02

계간 시와징후 여름호

계간 시와징후 여름호가 나왔다. P.S디카시-김남권, 문학의 현장-공지영 소설가와 나호열 시인의 작가와의 만남 현장을 소개했다. 기획연재 송재학의 시 산문-원명과 추명을 찾아서, 이승하의 문단이 놓친 징후, 특집 초대시는 안도현 시인 편으로 신작시와 근작시 산문을 수록했다. 신작시에는 강병철 권자미 김봄서 김성신 김윤삼 김은지 김창균 문 신 박연숙 박용진 배세복 백인덕 복효근 서춘희 석상진 성윤석 안이숲 양금희 옥효정 이기철 이주승 이 필 전윤호 조동범 조희진 최경선 최윤정 최 휘 시인의 작품이 실렸고, 신작 시조는 김남규 김덕남 박희정, 신작 동시는 강 주 김미희 박미림 시인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해외작가는 에바 페트로포울로우 리아누, 룹씹 반다리, 안젤라 코스타, 자혼기르 노모조프, 프리앙카 네가의 ..

카테고리 없음 2024.06.01

물의 발톱-심은섭 시집

기억의 주머니 -박수근의 심은섭 한 여인이 첫돌의 사내아이를 등에 업고 빨래를 한다 그녀는 아이의 손금 속으로 무단 침입하려는 험상한 빈곤과 북극의 바람을 방망이로 두들기며 개울물에 헹구고 있다 그럴수록 아이는 수탉이 불러들인 새벽으로 자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여인의 등은 인간 발전기이다 그녀의 등에서 생산된 단단한 모양이 등에 업혀 잠든 아이에게 온종일 충전되고 있다 그때마다 아이의 저녁이 밝아지고 조촐한 사주의 목록에 푸른 강물 하나 추가되었다 지금, 상수리나무 숲보다 더 울창한 웬 아이가 빨래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해일이 밀려오듯 속도에 중독되던 시간이 집어삼킨 그 여인의 흰 그림자, 그 아이는 기억의 주머니 속으로 그 그림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접시꽃 나는 그 꽃 ..

카테고리 없음 2024.05.31

파리가 돌아왔다-박미라 시집

나사論 박미라 '볼트와 너트'를 '나사'라고 일러줬다 뭐든지 다 알고 뭐든지 다 알게 했다 우산도 없이, 과꽃 모종을 들고 나서며 메밀 싹 같은 이슬비를 웃었다 세상이 떠넘긴 여러 개의 대명사를 지녔으므로 수시로 비틀댔다 틈만 나면 나사를 조이고 다녔다 부엌에도 창문에도 내 종아리에도 나사가 박혀 있었다 가장 많은 나사를 조이고 조인 그이의 몸에서는 입을 틀어막은 어떤 것들이 불씨를 사르거나 탁탁 터졌다 사르다가 만 불씨에 그을려 사계절 내내 캄캄했다 시난고난 견딘 과꽃이 환해지면 배실배실 웃고 다녔지만, 다섯 살에 보낸 어린 것이 별이 되었다는 건 믿지 않았다 도대체 그 많은 나사를 조이고 갔으면서 아직도 남았는지, 오늘은 내 손목에 나사를 조인다 이런, 그이가 두고 간 손이 내 손목에 달려 있었다 왜..

카테고리 없음 2024.05.30

세 번째 출구에서 우리는-서이령 시집

Delete 서이령 꽃, 메시지 그리고 너 소낙비가 내리는 창문이 그리워져서 눈을 감는다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네가 왔다 가는 것이 보이지만 문을 열면 무너질 것 같아서 (삭제)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는 너 먼 곳에 사는 너 한잔할래 허공에 잔 부딪치는 소리 들려 마음을 보여주겠다고 환하게 웃으며 내놓았던 꽃다발 (삭제) 하현달처럼 기울어가는 너 꽂잎 시들다가 떨어지고 있는데 기다리는 것도 한자리 술잔을 채우는 것은 찌르레기 울음소리로 남고 (삭제) 기억 속에 있는 너 술잔 속에 비친 나를 건져 올려 보아도 잊지 못하겠지 너를 (삭제) 지워도 지워도 다시 그 자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女子의 집 女子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난다고 말한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얼굴로 엉덩이를 맡긴 의자가 푹, ..

카테고리 없음 2024.05.29

요즘 입술-안이숲 시집

나비 경첩 안이숲 문틈에 나비 한 마리 다소곳 날개를 접고 있어요 놋쇠 장식으로 된 나비로 태어나 제대로 날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봄이 여름을 건너 뛰려 하고 있네요 종손이라는 이름에 걸린 가문 한 채 간수하느라 공중을 떠돌아 잔잔한 이곳에 뿌리를 내린 당신 방문이 열릴 때마다 낮은 발자국 소리에 묻은 녹슨 고백 소리 들려옵니다 솜털이 시작되는 고향에서 나비 무늬 박힌 치마저고리 입고 의령장에 구경 가던 팔랑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가볍게 날아오르던 어머니의 원행遠行엔 연지곤지 찍은 꽃들마저 고개를 숙였던가요 얘야! 시집와서 빗장을 지키는 게 평생의 일이었단다 느리게 접힌 쪽으로 아픈 고백을 쟁여둔 어머니 다음 생에는 날개를 달고 태어나지 마세요 몇 겹으로 박제된 풍장의 어머니 쇳가루 떨어지는 서러운 날갯짓 ..

카테고리 없음 2024.05.28

대명사들-이송희 사설시조시선

눈보라 이송희 당신의 계절은 으슬으슬 추웠어 어떤 말도 하지 못한 눈발이 퍼부은 날, 빈속을 헤집고 다닌 해고 문자 알림 소리 밤새도록 휘날린 한기에 떨었지 문밖에 선 채로 눈사람이 되었다가 눈 밖으로 밀려날까 얼음이 되었다가 입 안에 머금은 채 울먹울먹 삼킨 말들 가루가 된 시간들을 탈탈 털어 마셨어 아이는 집안에서 홀로 울고 있었어 기한을 훌쩍 넘긴 독촉장을 모아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털어 넣는 알약들, 흘러내린 슬픔마저 얼어붙은 밤이 가고 허공에 흩날린 꿈도 다 사라진 겨울 아침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잔혹 동화를 읽다 결말을 알았으나, 덮을 순 없었어 거칠고 긴 줄거리는 이면에 가려져 괄호에 말을 가두고 두려움을 삼켰지 빛나게 해준다는 틀에 박힌 문구는 오히려 식상해서 오래전에 잊었어 입술이 ..

카테고리 없음 2024.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