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타 블랙
황정산
튜브를 건너지 못하는
파동이거나 입자이거나
구김이 없으니 얼굴이 없다
빛난 적 없으니 색깔도 없다
동사로 존재했을 이름은
움직임을 잃고 부사로 남고
부끄러운 서명은 지워지고
두려운 음각의 흔적마다 사라졌다
옐로우는 마젠타와 함께 잘 구운 살갗을 만들고
시인은 옐로우와 섞여 휴식을 가장하지만
짜장면이 자장을 지우지 못하듯
잉여가 잉여를 없애지 못하고
이름은 이름을 대신하지 못한다
구멍이 구멍이 아니어도
모래는 모래가 아닌 모래가 하나도 없다
바람이 호명하고
풀잎이 지명하는
완벽한 블랙리스트
우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바지랑대의 하루
젖은 것들을 붙잡고도
슬프지 않았다
외줄 위에는 쉬이 이슬도 말랐다
죽은 아이의 머리칼을 물고
물길을 헤집어도
노엽지 않았다
물속에 길은 없었다
날개 가진 것들이 찾아오지만
잠시였다 그림자도 남기지 않았다
붉은 노을은 더 짧게 지나갔다
이제 하늘을 잴 시간이야
내가 쓰러지면 모두가 힘들어
말씀하시고 어머니는 누우셨다
누워서도 길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돋다
돋는 것들은 모두 아프다
수포도 소름도 새싹마저도
뱉은 말들이 모두
시옷자가 되어 거꾸로 떨어져 박혀
다시 입가에 돋아난다
수포는 아니라는 듯 그래서 아프다
나 아닌 것들이 나에게 다가와
꽃이 아닌 소름이 되었다
이물이 이물감을 잊어 다시 돋아난다
숨긴 고통이 더 아프다
새로 돋는 아픔
봄이 베듯 지나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인 황정산이 꿈꾸는 세계는 욕망이 폭력이 되지 않는 세상, 아슬아슬하지만 그래서 이상주의도 아니고 현실주의도 아닌 '삼인칭 주인공'이 되는 그런 곳이다. 그 바깥의 시점에서 냉소적이지 않으면서 다정하게 있기, 바깥의 내밀함으로 한없이 풀어지기, 우리는 그것을 유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늘 미소 짓고 있지만 파안대소로 해방되지 않고 분노로 공격하지도 않으며, 얼마쯤 갇혀 있고 얼마쯤 벗어난다. 그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서 해서는 안 될 일들을 빼곡히 적는다. 할 수 있지만 안 하기, 그것은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힘에서 가능하다. 그 힘이야말로 시인 황정산을 여전히 젊어지게 하는 비결이다.
-정은경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