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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는 말은 아주 먼 곳에서 오는 말이다-최성규 시집

김남권 2024. 11. 8. 14:52

반생이* 묶는 법

최성규

어깨를 꽁꽁 묶어주세요
삐거덕 흔들거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해주세요
질끈 살았던 날들이 어긋나 풀어지지 않게
버텨 온 날들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게
차근차근 매듭을 다시 꿰매듯 말이에요
남아 있는 날들까지 지탱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요
실손보험이 가능하다면
좀 더 질긴 철끈이면 좋겠습니다
엇갈린 반골들의 마디 마디를 잡아당겨
어제보다 좀 더 조여 묶다 보면
기울어진 그림자도 고정될 수 있겠죠
고통은 끌어당겼을 때 단단해지는 법
느슨해진 날갯죽지를 통증의 쾌감이야말로
시원한 파스 냄새보다 강력한
확실히 견고해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연질 철사로 공사 현장에서 철근을 고정할 때 쓰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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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뽑았다

2023년 7월 19일
해병대원 순직 사건
청문회를 시작했다는
뉴스를 켜놓고

아내가
요즘 들어 새치가 늘었다며
머리카락을 뽑는다


잘못 뽑았네
잘못 뽑았어

아내 혼잣말이
증인들 선서보다
더 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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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모기

모기야
목이 아프게
울어대는 건 좋은데
피 같은 시 한편
방금 떠올랐는데
잽싸게 빨아먹고
도망친단 말이냐

얼마나 달콤했으면
피눈물 대신
그렁그렁 시 한줄
빨아먹었단 말이냐

나도 너처럼
어떤 사유에 갇혀
어둠만 긁적거리는 신세로 살기 싫으면
귓전에서 제발 징징거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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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 시인은 '너머'의 찬란한 것과 거대한 가능성이라는 막연함에 무너지지도 않으며, 하이데거 철학의 실존의 우울함(사멸성)에 빠져 낙오하지 않는다. 그는 죽어가는 존재 이전에 인간은 살아가고 있으며 행위를 하는 존재이며, 요소의 세계와 관계를 맺는 존재임을 강하게 믿으며 자신의 시세계로 주저하지 않고 진입한다. 그때 시인은 주어진 현실과 현재에 시의 씨앗을 뿌려 새로운 시작의 지평을 열어간다. 최성규의 시 쓰기는 관계라는 폐허로부터 구원받는 존재의 기적을 체험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염선옥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