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김영삼
갈아 놓은 밭에서 백로 한 마리
한참을 섰다 한 걸음씩 세월없이 간다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이 많은 지
온몸이 '?'
한 발을 앞으로 내밀 때 모가지도 앞으로 늘어나고
내민 발이 땅에 닿을 때 모가지도 도로 오므라들고
한 발짝 옮길 때마다 허물고 새로 짓는 물음표
초짜 농군이 신기한 농서를 보듯
밭이랑 골똘히 들여다보다 잠시 먼 산도 보고
가끔 큰 답을 얻었는지 목을 길게 쭉 내뽑아
온몸이 '!'표다
홀로 묻고 홀로 답하여 홀로 가는 몸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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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가는 길
내 마음이 너에게로 가는 길은
밤길이다
한낮에도 굳이 가겠다고 하면
나는 눈을 감아
밤이 되어 준다
그리하지 않아도 갈 수는 있지만
내 마음은 눈뜬 봉사라
밝은 길보다 어둔 길이 더 빠르다
어두면 어둘수록 가는 길은 훤하다
너는 눈을 감지 않아도 된다
늦은 밤에도 오래 밝혀라
너에게로 가는 내 마음 길은
벌건 대낮도 캄캄한 밤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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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
너를 보내려고
수평선 너머로 아주 떠나보내려고
바닷가에 왔다
한때 너는 나의 종교여서
온갖 말씀과 믿음으로 두툼해진 경전
차마, 통째로 던질 수는 없고
한 장 한 장 뜯어내어
종이배로 띄워 보내야 하는데
저 멀리 흘러가다가는 제자리서
갈매기 떼처럼 둥둥 떠서 일렁거리고
나는 마음 약해질까 애타고 조급하여
네가 넘어가야 할 먼 경계선만 바라보는데
철-씩, 철-썩
띄워 보냈던 것이 언제 밀려와
발밑에 축축한 종잇장이 하얗게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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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시인은 "시는 왜 쓰는가, 시는 어떻게 진화하는가"라는 질문에 모범적 답을 찾아가는 시인이다. 첫 시집에서 허수아비의 삶을 건너기 위해 주인 되기를 선택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홀로서기의 힘든 여정을 보여 준다. 세상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이해를 안고 살아온 시인이 시 쓰기를 통해 이해를 경신하고 홀로서기를 해 나가는 과정은 진지하고도 치열하다. 시 '백로'의 표현을 빌리면 그 과정은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이 많은지/온몸이 '?'이다가 가끔 큰 답을 얻었는지 목을 길게 쭉 내뽑아/온몸이 '!'표"인 길이다. 시인의 이러한 행로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 "홀로 묻고 홀로 답하며 홀로 가는 몸이 눈부시다"라는 구절을 시인에게 고스란히 되돌려 주고 싶게 만든다.
-이홍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