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질의 사회학
김파란
눈물은 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눈물은 사람의 뒤꿈치에서 만들어진다
나무의 뿌리가 땅속 깊은 물을 끌어 올리듯
사람의 뒤꿈치는 직립보행 하는 순간부터
삶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뒤꿈치에 모은다
기쁠 땐 중력의 힘을 벗어난 가벼운 무게로
절망을 경험할 땐 중력보다 큰 만유인력의 무게로
경건한 순간엔 뒤꿈치를 바짝 세워
신과 사람을 받든다
부모의 뒤꿈치는 자식을 기르는 동안
세상의 물을 모두 끌어다 써서
물기 한 방울 없는 메마른 논바닥이 된다
쓸어내고 쓸어내도 새로 돋아나는 각질은
뒤꿈치를 수만 번 돌아 나온 눈물이
내다 버린 슬픔의 찌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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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관계학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반드시 밥을 같이 먹어봐야 한다
진실은 입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 별에 있기 때문이다
궁금한 사람이 생기면
반드시 밥을 같이 먹어봐야 한다
평소 그가 즐겨 먹는 음식은
그의 인생을 찾아가는 지도이기 때문이다
입 안에 있는 밥을 튀기면서까지
말하는 사람은 배려심이 없고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다
상대의 밥 먹는 모습을
사랑스레 바라보는 사람은
음식 베풀기를 좋아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제 밥그릇만 보면서 먹는 사람과
먼저 먹고 빨리 일어서는 사람은
찰나에 감사할 줄 모르고
나눔이 서툴고 어색한 사람이다
한 끼의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의뭉스러운 가면을 벗어놓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함께 추억하는 인생의 한 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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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내가 걷는 인생이라는 길 위에
누군가가 심어 준
어여쁜 풀, 꽃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거친 돌멩이를 심는 일이다
데면데면히 길을 걷다가
발부리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게 되면
툴툴거리며 가라앉았던 흙먼지를 깨워
눈과 코를 맵게 하는 일이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내가 걸어가는 인생길이
더 이상 누구도 오고 가지 않는
외딴섬이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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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랩소디
귀여운 아들이 사 온 병아리가
베란다를 날아오르는 중닭이 되던 날
병아리를 품어 주었던 장난감 통은
석회 담장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처럼
쾌쾌한 잿빛 닭똥으로 뒤덮였다
나는 인심 쓰듯 한 평 남짓한 욕실에서
뜨거운 물에 불려 철 수세미로 벅벅 긁어대는
두어 시간의 간절한 세신 수행을 시작하였다
108배를 올리듯 다소곳이 합장하고
엎드려 무릎을 구부린 채
이마에서부터 발끝까지 땀을 쏟았는데도
삶에 집착이 심한 닭똥은
떨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포기하고 장난감 통을 버릴까 하니
갑자기 뒤통수가 번갯불에 뜨거워졌다
겉으로는 착한 척 우아한 척 위장하고
그 속은 닭똥보다도 더 비릿한 욕망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오물 덩어리
간절한 세신 수행에도 씻기지 않았던 것은
닭똥을 품었던 장난감 통이 아니라
이기적인 오물 덩어리 나였던 것이다
결국, 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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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Hehr질 결심
수백 번의 달구질로 다져진 땅 위에
펑퍼짐한 주춧돌을 올렸다
돌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기 위해
목수는 숨을 멈추고 고요한 그랭이질로
나무 밑동에 돌의 모양을 새겨 넣었다
자신을 깎아내지 않고서는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없듯이
마침내
돌과 나무는 완벽한 사랑을 이루었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한 치목은
세상을 떠받드는 대들보가 되었고
큰 못질로 서까래를 이어
평생에 매정했던 하늘을 덮었다
그렇게 공들인 나의 한옥은
천년이 넘도록
흔들림 없이 견고하리라 믿었었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믿었었다
너를 만나
나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깨져 집과 함께
안갯속 모래알로 흩어져 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붕괴되고 말았다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 좋다
너를 영원히 놓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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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이장현
천장에 모여 있던 수증기가 떨어진다
건조했던 콧속에 물길이 생겼다
숨 쉬는 것이 이토록 평안한 적이 있었던가
눈을 감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을 지우고 생각하지 않는다
잠에 빠지듯 명상에 잠긴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물길, 물소리
내 안에서 우주가 돌아간다
물이 나에게 집중한다
블랙홀에서 은하에서 가장 밝은 빛을 뿜어낸다
빛은 곧 사라지고 유성이 된다
침잠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너는 누구인가?
가슴에 초승달 같은 물음표가 떠올라
책장을 펼쳤다
맙소사! 이장현*과 눈이 마주쳤다
이내 달콤한 상상에 빠진다
다시 첫사랑이다
*이장현 : TV 드라마 [연인]의 주인공, 조선 중기 실존 인물(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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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란 시인의 첫 번째 시집 ‘헤어Herr질 결심’은 제목만 얼핏 보면 탕웨이 박해일 주연의 영화가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주연 배우들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결국 한 사람이 죽음을 택하면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그러나 김파란의 시집 제목은 한국어의 어감만 같을 뿐 영어 ‘Hehr’로 숭고한, 고귀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김파란 시집의 시편들은 그가 살아온 생애의 희로애락이 오롯하게 담겨 있고, 그 결말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올해 초 강원시조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원시조’ 신인문학상 은상을 받으며 문단에 데뷔하고, 여름에는 계간 ‘시와소금’에 ‘Phone神’외5 편의 신작시를 응모해 신인문학상 당선의 영예를 안고 문단의 말석에 이름을 올리고 첫 시집의 제목을 ‘헤어질(숭고한) 결심’이라고 선택한 것은 그가 살아갈 시인의 운명을 미리 예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남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