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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ㆍ오프는 로봇 명령어가 아니다-이도화 시집

김남권 2024. 8. 22. 08:01

종점

이도화

쪽방에 버려져 있던 한 청년의 고독사는 살이 녹아내리고 흰 뼈가 드러나서야 공기를 타고 주위에 알려졌다

고시촌 곳곳에서 발길을 감추기 시작한 낡은 후드 티의 형제들, 구부정해진 고독을 한 차례 더 꺾어 어둠 속에 밀어 넣는다

거미줄로 동여맨 반지하 칸막이 방에는
창이 있어도 새어 나올 빛이 없고
말끔히 빈 지갑에는 라면스프 봉지가 들어있다

코끝에 감돌았을 한 모금의 숨,
좇아 까치발을 세우려 해도
방바닥은 쓰레기 늪, 푹푹
무릎까지 빠지고 있었을 것인데

짧게 줄여 쓴 이력서와
고쳐 쓰다만 자소서가 꽂혀있는 책꽂이 위로는
고이 걸어둔 양복 한 벌,
시종 근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묵은지 사랑

티격태격하면서도 마침내 황혼에 이른 사랑은
함께 노을에 젖어드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 안쓰러운 눈길이며
밤새 남편 입가에 마른침 자국을 떼어주는
아내 무심한 손길이다

예쁘다 한마디에
반짝이던 사십 수년 전 눈동자로 돌아가는 새색시는 어설픈 사랑 연기에도
서슴없이 다가서는 희미한 좁은 무대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여인,

세월의 뒷자락에 나와 함께 남겨진
하릴없는 저 여인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홀로 새는 밤

스물 하늘에는 별자리가 깨어지고
바다로 내려가는 강가에 유독 깜박이던 별 하나
오래 제자리에 떠 있었다

서른 부푼 강물은 흘러가고
마른 강바닥을 지나 쉰의 고개에 올랐다
내려서니 예순의 벼랑 끝

가파르게 내려선 해변에는
평생 물질로 늙은 해녀들
숨 쉴 바다를 지켜낸 종아리가
여전히 탄탄하다

종일 물가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물병자리에 손을 뻗어 마른 목을 축이는 밤
이곳 주소가 없는 나는
홀로 야경을 돌며 별 하나를 찾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도화의 두 번째 시집 '온ㆍ오프는 로봇 명령어가 아니다'는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가 어떻게 물결을 일으키고 그 물결이 일으킨 삶의 무늬가 얼마나 선명한지를 보여준다. 시인은 삶의 방향을 바꿀 주요한 선택 이후 평범했던 날들이 어찌 새롭고 특별한 날들로 옷을 갈아입는지 그리하여 경험의 세계와 결합한 여생이 어떤 여정을 거쳐 운행하는지를 과장되지 않은 진솔한 언어로 들려준다.
당연하게도 이번 시집은 세 번의 탁월한 선택이 만들어낸 곡진한 결과물이다.
-김정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