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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읽는다-홍승자 시집

김남권 2024. 8. 20. 09:20

봄으로 가는 동백

흥승자

푸른 잎을 압도하는 붉은 빛
외겹 입술 단아하게 열어
황금빛 첫사랑 그 겨운 고백을
목숨 다해 뱉어냅니다
붉디붉게 피었다가
단칼에 툭, 툭 베어지는
아릿아릿한 저 젊은 열정을 휘감고,
부연 아지랑이 속을 출렁이며 걸음을 놓고 있습니다

아랫녘 강산이라도 아직 겨울 자락을 놓지 못하는데
잔설 위에 각혈 붉게 흩뿌리는 동백
어찌 이리 뜨거운지요
햇살에 기대어
남녘 산사를 찾아드는 길가엔
두고 간 絶命 詩들 낭자합니다
무심한 햇살도 따끈따끈 동토의 해동을 꿈꾸네요

일상의 일탈로 누리는 자연과 자유는 동의어여서
무디고 무뎌진 나의 심연에
젖줄처럼 찌르르 도는 시원의 강줄기
서럽도록 고운
남녘 산천 한 구비 두 구비에
그 시원의 물꼬를 터트리며 내달립니다
동백처럼 아린 젊음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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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속의 시간

나는 달팽이를 닮아간다
새벽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
겨우 두 식구 아침밥 차리는 시간이다
옛 솜씨를 살려내지는 못하면서 느릿느릿
엉뚱하게 손가락부터 온몸이 시큰거린다
오십 년 경력 요리사 사표를 내고 싶다

삼시 세끼,
이렇게 힘겹고 무거운 말일 줄 몰랐지
경력인정 시대에
이 평생직장은 경력도 사표도 해당 사항 없다

티 하나 안 나는 그 자리를 맴돌다가 맥빠진
내 몸이란 기계는 마모된 부속들로 삐걱대는 고물인데
나보다 더 엉성한 기계가 돼버린 오래 산 남자는
착각 속의 시간으로 미끄러지고 있는지
눈치 하나 없이, 둔하디둔하게
영원히 젊은 아내 시중받으며 목하 安居 中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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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안목역

안목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는다
간이역 역사의 나그네는
뱅쇼 한 잔으로 추억을 따끈하게 홀짝이며
잔기침을 쿨럭이기도 한다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처럼
안목에 눈이 오면
등에 짊어진 바다를 푸르게 풀어놓고
봄을 부르는 사나이가
간이역을 지나치는 여인을 바라보기도
장난감처럼 작은 자동차를 바라보기도 하며
지붕위에 쌓이는 눈송이를 바라본다
꿈꾸듯 고향의 봄을 생각한다
음력 정초가 지나면
산간 마을보다 바닷가로 많은 눈이 내린다는데
바다에 내리는 눈은 눈 녹듯 녹아 흔적이 없다
눈물에 젖은 파도는 더욱 촉촉하게 봄을 일으키고 있다
카페 안목역은 등背진 바다의 파도를 감지하며
나그네들은 미나리아재비 빛 푸른 봄 바다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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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을 배웅해야 할 때가 다가온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은
구름 또한 예사롭지 않게
자리를 썩 비켜준 쾌청이다

그리 쉽징만은 않은 일을 위해
발돋움하며
무엇을 채우려
애써온 시 쓰기인가

이제는 툭툭 털고 일어나
저 쾌청의 하늘처럼
비워서 가득한 시인이 되고 싶다

-시인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