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푸른, 숨-이주영 시집

김남권 2024. 8. 18. 08:43

푸른, 숨

이주영

어둠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기 위해
적막을 끌어안는다

낮게 내려앉은 밤의 소리들이
불나방처럼 날아와
새벽을 훔치기 시작했다

길을 찾는 그믐달은
아직 발자국을 떼지 못했지만
몸을 달싹이는 태초의 소망 몇 가지가
보름달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무겁게 걸쳤던 어제의 굴레를 벗어놓고
말갛게 흐르는 은하수를
온몸 가득 퍼 담았다

냉기에 시달리던 과거를 씻기자
목련꽃 속살같이 피어나는 낱말들
상처를 동여맨 날숨의 순도에
녹색불이 켜지고
안에서 푸른 숨이 튀어 나왔다

과거와 현재를 알맞게 버무린 그 길에
내 삶을 끌어안은 돋을볕 하나
부시게 걸어오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별을 팔아 봄을 샀다

우화를 꿈꾸던
꽃상여에 매달려
한 마리 나비로 날아갔다

그 후로 기억이 역류할 때마다
몸 속엔 빙하가 쌓여 갔고
긴긴 시간 깊은 겨울이었다

휘어진 세월 저편에
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쓸쓸을
가만히 만져 보다가
생의 저 편을 생각하기도 했다

강물 같은 세월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이별에 갇힌 상흔들이
하얗게 쏟아져 나왔다

강산이 몇 번 출렁이고
꽃이 피었다 지는 이유를 알고 나서
강물의 뒤척임이 고요해질 때

가슴을 짓누르던 빙하가
뜨겁게 용해되고
드디어 나의 문장에도
정맥 같은 첫 줄이 쓰이기 시작했다

눈가의 습기가 마르던 그 해
나는 이별을 팔아
이순의 봄을 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철

단물 빠져 나간 자리에
삐걱대는 삭신만 남았네

자식들 뒷바라지에
앙상한 뼈 마디마디

밤마다 아무도 몰래
혼자 바스럭거렸을
엄마의 무릎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번 시집에서 '푸른'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늘 푸른이라 읽히기보다 그리되고 싶다는 소망이 얹혀 있다. 멍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지만 속 울음 삼킨 지난날을 눈물체, 피땀체로 그려낸다. 살다 보면 매번 나쁜 일만 일어나지 않지만 기쁜 일은 무시하거나 쉬 잊게 되고 슬픈 일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막다른 길이란 없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가면 되고 절망에 서면 희망을 꿈꾸면 된다.
-이기철 시인

이주영 시인의 시를 읽다가 몇 번이나 타는 노을을 바라 보았다. 그녀의 시는 사람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쓸쓸을 노래하다가 애가 타 왈칵 눈물을 쏟게하고, 그러다 고운 손길로 사랑으로 쓰다듬는다. 그녀의 시는 상처에서 오지만 결국 꽃 같은 사랑으로 귀결 짓는다. 그녀가 견뎌낸 상처가 피워낸 문장은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이비단모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