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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비밀-한영미 시집

김남권 2024. 7. 31. 07:29

누군가 나를 꿈꾸기를 멈춘다면

한영미

폐허의 복원은 우연한 발견 때문이었지요

유적이 발굴되었을 때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어요
숭숭 뚫린 구멍에 석회 물을 부어 넣었더니
놀랍게도 사람 형상이 굳어 나왔다고 해요
허공도 사실은 누군가의 틀이었던 거죠

그래요, 나는 당신 꿈에 주입된 복제본이에요
하지만 그런 당신도 에디션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요

화산폭발에 놓인 최후의 모습들을 보았어요
죽음이 간절해하는 것은 결국 삶이라는 것을
절박은 누군가의 형틀이겠지요

우리, 라는 자리에 석회 물을 흘려 넣고 싶었어요
껴안은 채 수천 년 묻혔다가 복원된 형상엔
영원도 묻어 있을까요

기억을 흘려 넣으니, 유적지의 휑한 바람벽조차
그 자리를 지키느라
그리 오래 견뎌왔다는 걸 알겠어요

숱한 감정이 찍혀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원형으로부터
점점 마모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서 나를 깨어내고 있어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현재

현재라는 이름은 엄마가 지었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점쳐 주는 엄마에겐
붙잡고 싶은 것이 현재였을까
사람들은 줄지어 앞날을 물어오는데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현재가 심약해질 때면
불쑥 훗날이 옮겨붙어
눈앞에 스쳤다고 한다

뒤꼍에 핀 달맞이꽃을 닮아가는 현재에게
그것은 무섭고도 당황스런 일이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다행인지
흔들리지 않을 만큼 심지가 자랐다
미래가 현재에게 말을 걸어오면
현재는 미래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설사 그것이 위협일지라도

내일을 내보이면 오늘이 감정을 버렸다
끝이 훤히 보이는 사랑
쉽게 져버릴 목숨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 꽃잎들

하지만 다른 것에 마음을 기대는 것은
억울한 누군가에게 꽃대를 맡기는 것이어서

유일하게 받아 적을 미래의 말이 있다면
엄마에겐 현재뿐이었다는 것

엄마는 현재가 나아질 거라고 점쳤고
어느 날 눈이 멀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슈뢰딩거의 이별

상자는 너에 대한 나의 두 마음
나의 두 마음이 너를 향한 확률

너는 살아서 빛나는 파란 눈을 보지 못하고
죽어서 굳게 내리감은 눈꺼풀을 본다

손을 넣어 등을 만져볼 기쳑도 없이
흔들어 깨워볼 겨를도 없이 너는,

죽음을 쓰다듬는다
쓰다듬는다 죽음을

그 순간부터 나는 고양이,
그에 걸맞은 이별의 자세가 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영미 시집 슈뢰딩거의 비밀에는 "기시감이 다중우주처럼 차원을 달리해 펼쳐지다가/낯선 풍경으로 지워지길 여러 차례"[잠의 세계] 한다는 마술의 세계가 펼쳐진다. 마술사는 마술이 이루어지는 모든 변화 과정을 관객에게 보여주지만 처음과 끝은 어차피 마술사의 손에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마술사는 처음과 끝을 쥐고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창조하는 자다.
시인도 마술사와 유사하지만 두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시인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창조하지 않고, 보이는 것 즉 "내가 아닌 물고기가/내가 되어버리는"[시인의 말] 과정을 기록한다는 점이다. -염선옥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