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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프랑스의 오후-권지영 시집

김남권 2024. 7. 9. 09:56

비의 은유

권지영

울적한 나날을 사흘 나흘 보내다가
불현듯 왈칵 쏟아내며 파안대소하는 비는
하늘의 웃음이다

목마른 땅, 쩍쩍 갈라진 농부의 가슴 보듬고
귀한 젖을 물려주는 비는
하늘의 모성애이다

생의 고달픔에 허덕일 때 어깨 토닥여주고
한없이 슬플 때 함께 서럽게 울어주고
더없이 기쁠 때 시원하게 박수 보내 주는 비는
온정을 베푸는 키다리아저씨다

실처럼 가늘거나 장대처럼 굵거나
귓전을 때리거나 한없이 고요하거나
수직으로 질주하거나 안개처럼 스며들거나
부드럽게 젖어 들거나 투박하게 때리거나
언제 어떻게든 변화무쌍한 비는
능력자다
비는 알면 알수록 깊어지는
순환계의 따뜻한 마법사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기다림

기다림은 나와의 약속!

내 작은 뜨락에 목마른 풀이 자랐다

어느새 기다림은 삶의 일부로 박혀버려 만성이 되어가고

너를 쉬이 만날 수 없는 현실은,
무기력을 부르고 무의미를 낳기도 했다

무의미한 시간들 속
너를 만나리라는 기대의 싹을 틔우고
너를 그리워하며 인내의 뜨락을 일구었다

연못 안 고인물처럼
내 안의 외로움의 녹조가 끼고 조금씩 탁해져도
언젠가 맑은 세상으로 나아갈 날을 기다렸다

사랑을 위한 기다림은
나를 한층 홀로 서게
너를 더욱 소중하게 각인시키며
가슴 가득 설렘으로 살게 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생쥐와 함께 사는 생존법

내 머릿속엔 생쥐 한 마리 살고 있다

당차게 뇌혈관을 마구 헤집고 다니는 생쥐!
넓은 통로를 쏘다니다 좁아진 통로를 만나면
비집고 뚫고 지나가려 난장이다

어느 날 생쥐의 극심한 반란으로
타이레놀보다 강력한 한방이 필요할 때
망치로 일거에 잠 재우는 궁리를 하지만
제 뒤통수 찍기라 이내 포기하고

생쥐가 슬며시 찾아와 오래 머무는 날엔
두피를 꾹꾹 주무르고 조목조목 집어 가며 달래니
어느새 진정된 듯 고요해지고

심지어 두 눈 모두 저절로 감기고
두손 두발 항복하게 되는 날
결국, 램수면 상태의 처방으로 생쥐를 잠재우고

소심한 정신과 혹사한 육체를 추스르며
생쥐와의 전쟁을 치르고 나면
건재함에 웃음 짓는 나를 발견한다

생이 작아질 때 깨달음이 크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인의 시를 읽으며 삶의 결을 만났다. 자신의 머릿속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괴롭히는 편두통을 작은 생쥐로 비유해 달래가며 살아가야 하는 장면에서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관록이 엿보이기도 한다. 포노사피엔스라 불리는 새로운 현세대의 출현에 대한 센스있는 접근도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촉수를 갖고 탐색하는 세밀한 시선이 있기에 가능하다. 시인의 삶이 아름답고 뜨겁게 펼쳐지는 쁘띠프랑스의 오후, 나는 그녀의 시간 속에 머물며 그녀의 노래에 오래도록 귀 기울인다. 한 권의 시집에서 다양한 읽을거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문정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