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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부족하다-이 은 시집

김남권 2024. 6. 5. 08:49

언니, 우리 물류창고에서 만나요

이  은

  창고가 보이면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그것이 창고에 대한 예의니까요

  어제는 S푸드, 훈제된 고깃덩어리들을 포장했어요 그제는 올포유, 당신을 위해 사정없이 옷을 갰어요 하마터면 옷에 깔려 죽는 줄 알았어요 오늘은 아이스크림 공장, 우주선이 희미한 빛을 내며 지나가요 떨어지는 것들은 모두 속도가 됩니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는 얼음이 쏟아져요 얼어붙은 손가락이 비명을 질러요 손가락은 가만히 둔 채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려요 빵과 빵 사이 너무 많은 눈보라, 빵또아에 끼어 있는 손가락이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설렘의 구멍에 얼음을 가득 채워요 설렘과 설렘 사이 너무 많은 눈보라, 꼿꼿이 서서 눈보라를 맞고 있는 설렘, 재빠르게 히말라야산맥의 눈을 퍼담아요 몸속에 가득한 눈보라,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눈보라, 눈보라에 갇혀서, 뜨거운 어둠 속에서 오소소 돋아나는 눈보라,

  눈보라를 헤치고 깨진 얼음 조각 같은 달이 따라 옵니다 버스 안에 몸을 숨기고 얼어붙은 손가락을 문지릅니다 오늘따라 버스 안은 엄숙합니다

  강 건너에 오늘의 일용할 해가 떠올랐습니다
  언니, 우리 내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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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가 되어간다

  창고가 텅 비어서 상자를 채워나갔다
  상자를 쌓아놓고 보니 너무 가벼워서 다시는 상자가 되지 않으려고
  각을 세운 상자들을 피해 다녔다

  창고보다 먼 밤에 일하기로 했다
  눈앞에 검은 패닝을 입은 펭귄들이 컨베어벨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되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칠면조, 햄, 치즈 ᆢᆢ
  상자가 무거워 손목을 부러뜨리긴 글렀다
  말이 사라지고 나면 밤의 언어들이 탄생했다

  죽은 것들을 질질 끌고 갈 수는 없었다, 한 개의 창고를 지우고 두 개의 창고를 지우고
  하나의 창고가 될 때까지
  몸을 웅크리고 무의식을 움켜쥐고 있었다

  창고가 텅 비어서 밤의 언어를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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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공동체 1

밤의 눈동자들이 모여든다
저 많은 얼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얼음컵을 빼지도 밀어 넣지도 못하는 순간
누군가 손을 밀어 넣는다

기계의 손가락에 찍힌 얼음같이 찌그러지기 시작한다
쇠막대로 얼음의 통로를 두들겨 보아도
얼음컵을 물고 있는 기계가 사냥감을 입에 물고 놓지 않은
야생 사자같이 기계손이 펴지지 않는다

얼음이 피 흘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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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의 시에서 화자들은 이러한 노동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호소하는 한편으로 기계가 주도하는 노동 과정이 노동자를 기계 인간 또는 인간 기계로 변모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용시에 등장하는 기계 앞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인간과 기계가 구별되지 않는 순간이 온다라는 진술이 대표적이다. 이은의 시에는 이러한 진술이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등장한다. 나는 인간 기계가 되어 갑니다, 움직이는 걸 멈출 수가 없는 나는/기계 인간, 인간 기계라 해야 할까, 나의 마음은 기계를 닮아갔다, 나는 인공 심장 박동기를 달고 기계 인간이 되어 가는 중이다, 심장이 뛰고 있는 건지 기계가 뛰고 있는 건지/나는 기계 인간이 되고, 기계와 함께 기계에 들러붙어서 기계가 주도하는 노동 과정의 폭력성과 그로 인해 자신이 기계가 된 것 같다는 진술은 이은의 시에서 사실상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고봉준 시인의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