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꽃
이 달
혹독한 겨울을
뿌리로 견뎌야만 봄을 맞이할 수 있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깜깜한 어둠을 하얗게 지새운 수많은 날들이 지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가지마다 까치발 세워 물길을 내느라
발톱이 다 닳았을 것이다
그렇게 망울망울 붉은 눈물을 머금고
하얗게 하얗게 피어나는 조팝꽃을 마주했다
핏덩이인 나를 낳고
까무룩하게 쓰러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엄마 곁에서
뽀얀 배냇저고리에 싸여 울음을 터트리던 그날처럼
1,000도의 화장로에 들어가는 아버지를 보고
"니 아부지 어떡하냐 안 된다 안 돼"
"뜨거워서 어떡하냐 안 된다 안 돼"
피눈물 흘리며 뜨겁게 통곡하다 이내 실신하던
엄마를 바라보던 조팝꽃 무더기
일흔여덟
생의 마지막 숨결로 뜨겁게 타올라
해마다 사월이 오면
아버지 가신 길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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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순이 없는 옥순이네
윤희네
해숙이네
순자네
진영이네
완명이네
해중이네
옥자네
큰 아이 이름으로 부르던
옥순이네 동네 일곱 집
윤희네는 창수네로 불리다 부산으로 떠난 지 오래
해숙이네, 순자네도 이사가고
진영이네는 엄마가 집을 지킨다
90세 넘은 완명이네 할머니는
지난 여름 벼락에 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큰딸이 모셔갔다고 한다
허물지도 못하는 해중이네 집은
온갖 풀이 주인이 된지 오래고
옥자네는 옥분이네 종주네로 불리다 옥순이네로 불린다
옥순이네 집에
옥순이는 없고
옥순이네 엄마 혼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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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소주 한 잔이
긴 터널을 지난다
잠시 입안을 맴돌다 식도를 따라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위장을 사정없이 훑어간다
너만큼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본
누군가가 또 있었을까
잔 들어 건배를 외치며
함께 했던 사람들 많았지만
그저 겉만 스쳐간 인연이었구나
빈 병에 처음처럼 바람이 눕고
취기를 흔드는 누군가 새로 다녀갔다
*2022년 새로 출시된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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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의 약속
어느 동네 어귀 야트막한 산 아래
통나무 기둥을 세워 흙벽을 바르고
지붕엔 기와를 얹으리라
긴 마루 끝에 봉당을 만들고
그 위에 고무신 두 켤레를 나란히 놓아두리라
커다란 서재를 들여놓고
바람이 쉬었다가는 미닫이문에는
코스모스 꽃을 창호지 위에 피우리라
먼 길 떠난 그대 위해
등불 하나 밝혀놓고
그리운 숨소리가 어둠을 몰고 돌아오면
맨발로 겅중겅중 마중을 나가리라
새벽 첫 우물 길어 올린 물로 쌀을 씻고
희나리꽃 피워 강낭콩 밥을 지어
푸성귀 얹은 소박한 밥상 앞에 마주 앉아
늘어가는 흰 머리를 바라보며 호박꽃처럼 웃으리라
짙은 어둠이 드리운 마당에 별빛 한 줌 들여놓고
늙은 무릎을 베고 누워 달님과 눈맞춤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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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멍, 컹컹, 형형
반달이 기다리는 초록빛 하늘로
별 만나러 가는 길
수줍은 사천삼백이십일 걸음을 옮기면
나를 반기는 소리
초사흘 날에는 멍멍
초이레 날에는 고뿔을 달았는지 컹컹
오늘은 형형, 하며 시인을 부른다
어라, 요 녀석 수놈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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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시인의 시어들은 자연에서 불러온 언어들을 자신만의 심상의 언어로 전환하여 비유와 풍자로 삶의 희로애락을 물결무늬로 풀어내고 있다.
자연을 닮은 순박한 사람들의 진솔한 언어가 시대를 초월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의 삶에서 우러나온 사연과 공감각적 상상의 이미지를 통해 툭, 툭, 내뱉는 시어들이 편안한 심상을 불러 일으킨다. 익숙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순간순간 말을 걸어오고 난삽하지 않고 정제된 숨결로 낯설지 않지만 쉽지 않은 삶의 파문을 만들고 있다.
-김남권 시인 '시와징후'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