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산문집 '십일월'을 읽고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같이 힘 있다" 민태원의 낭만적인 수필 청춘 예찬이 아니어도 청년기는 그 힘이나 모습이나 열정이나 가능성으로 찬미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청년기는 활기에 넘치고 약동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미숙하여 판단을 그르치기도 하는 시기이다. 오네긴은 랜스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풀이로 렌스키의 약혼녀 올가를 유혹하여 춤을 추고 질투에 눈이 먼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들이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다면 죽음을 담보로 하는 무모한 행동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이라든가 직장이라든가 각자 지키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어깨를 누르거나, 삶의 경험이 쌓여 상황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한발 물러서는 여유를 가질 테니까. 아, 청춘은 아름답지만 얼마나 무모하며 얼마나 미숙한 시기인가.
-본문 59~60쪽 나이 듦. 부분
"작가는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창설자이며, 언어의 땅을 경작하는 옛 농부의 상속인이며, 우물을 파는 사람이며, 집 짓는 목수이다. 이와 반대로 독자는 여행객이다. 남의 땅을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자기가 쓰지 않은 들판을 가로질러 다니며 밀렵하고, 이집트의 재산을 약탈하여 향유하는 유목민이다" 로제 샤르티에의 읽는다는 것의 역사 머리말에 나오는 이 말은 독서라는 행위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작가는 재배하고 독자는 맛본다. 작가는 만들고 독자는 누린다. 작가는 보여주고 독자는 즐긴다.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디독 정독 계독 남독ᆢᆢ ᆢ모두 여러 가지 독서 방법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많이 읽고, 꼼꼼하게 읽고, 주제별로 읽고, 주제와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읽고 ᆢ그뿐 아니라 빨리 읽는 속독, 메모해 가며 상세히 읽는 지독, 차근차근 빠짐없이 읽는 통독,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는 발췌독 등 독서에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처럼 어떤 행위를 가리키는 낱말이 많다는 것은 그것이 범용성을 갖는 일반적이고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 62~63쪽 윤독의 즐거움. 부분.
십일월이다. 가을이 살짝 모자를 들어 올리며 작별을 고하고 겨울이 외투 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달이다. 상강을 지난 날씨는 갑자기 싸늘해지고, 해가 짧아져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앞세워 집에 돌아오면서 다시 한번 중얼거려 본다. 십일월이네, 벌써, 어느덧, 이제, 어느새 십일월이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기분, 시월엔 카톡에 간간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같은 가을에 대한 노래들이 올라오더니 십일월엔 그마저 침묵이다. 십일월의 노래는 어디로 갔나. 그러고 보니 아침마다 노래하던 뒷산의 새들도 이제 지저귀지 않는다. 새들의 지저귐은 어디로 갔나. 마지막 가을 햇볕을 쬐던 호박벌은, 은빛으로 떠댜니던 박주가리 씨앗은, 십일월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무슨 색일까, 황금빛 은행잎과 찬란하던 단풍은 이내 빛을 잃고 갈색으로 변해 땅에 떨어진다. 빽빽하던 숲은 헐거워지고 나뭇가지 사이로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이 보인다. 새파란 하늘과 타는 듯 붉던 단풍이 선연한 대조를 이루던 가을의 절정을 지나, 이제 하늘과 대지는 엇비슷한 색깔로 닮아가고 있다.
손가락처럼 펼쳐진 나뭇가지를 보면 나무와 하늘이 서로 껴안거나 악수를 하는 것 같다. 십일월엔 저들도 쓸쓸한 것이다.
-본문 85~86쪽 십일월. 부분
저녁
송은숙
구름이 묽은 수프처럼 떠 있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강가에서 바라보는 저녁은
수프와 대구 머리가 놓인 단란한 식탁을 향해
귀가를 서두른다 가장 푹신한 의자와
불가의 따스한 자리를 향해
새들은 전속력으로 숲으로 날아들고
강은 온몸을 끌며 내딛는 것이다
나는 먼 마을에 등불이 내걸리는 것을
꽃잎이 제 몸을 둥글게 말아
노란 등불을 감싸는 등피가 되는 것을 본다
거미가 알집을 껴안고 세계의 중심에서
가만히 웅크리는 것을 본다
수면을 치던 실잠자리가 날개를 접고
고요히 밤의 뒷면에 매달리는 것을 본다
감자와 대구의 살점을 헤집는 포크처럼
저녁이 오고 있으므로
저녁 안개가 살충제처럼
낮고 축축하게 속으로 파고들므로
오래 들끓다 식어가는 웅덩이 위에
고양이 눈빛 같은 별로 떠서, 저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