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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잃고 말을 얻다-조재형 산문집

김남권 2024. 2. 6. 08:39

삼거리를 지키던

, 점방은 이제 없다.
중년의 어머니는 추억으로만 존재한다. 삼거리는 아직 그대로인데, 북적거리던 사람들은 하늘로, 땅속으로 자신들의 무대를 옮겼다. 남아 있던 젊은이들은 거개가 객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극장도, 이발소도, 만화방도, 담뱃가게도 문을 닫았으므로 그들은 마음 놓고 떠났다. 동네를 나고들 때 모두의 정거장이었던 점방은 어머니 혼자 먹고 혼자 잠드는 여염집이 된 지 오래다. 모두들 떠났는데 ... 어머니는 아직도 그곳에 진을 치고 있다. 누구나의 추억이 은신하고 있는 그곳에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데... 어머니는 아직 거기서 그 무엇인가, 그 누구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굴복된 적이 없이 말이다. 진즉 해가 저물었는데... 여직 문도 닫지 않은 채 마당을 서성이고 있다. 추억 속의 점방은 그대로 있고, 어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속해, 느리게 조용히 늙어 가는데... 내가 속한 여기의 우리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떤 세계를 향해 끝없이, 빠르게, 앞다투어 가고 있다.
-본문 18쪽 삼거리 점방 중에서

내가 수사관 출신, 현직 법무사로서 처음 시인이 되었을 때 우려스러웠다. 수사관의 길과 시인의 길은 완전히 상반된 세계라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수사관은 감정을 배제한 냉정한 법률이 지배하는 세계이고, 반면에 문학은 무모하고 비이성적인 것도 용납하는 감정의 세계로만 본 것이다.
그런데 수사관과 법무사로 오래 일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수사와 재판의 일을 제대로 하려면 그 범죄와 사건의 당사자인 인간 자체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궁극적으로 문학적 진수인 휴머니즘 문제와 법의 일이 상통한다는 걸 알게되었다.
-본문 94쪽 법과 문학의 거리 중에서

'빈손'과 '그레고리오'는 자신들의 뜻과 달리 죽음을 빨리 선고받았다. 하지만 죽음이 예고된 후 죽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시종일관 단호한 모습을 유지했다. 빈손과 그레고리오의 죽음을 읽기 전에는, 나는 죽음에 관한 한 최악의 독자였다. 그들의 죽음은 책으로 치면, 읽기 전과 읽은 후 세상의 삶과 죽음이 완전히 달리 보이게 하는 양서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죽음의 사고를 이 세상의 저편으로 데려다준다.
그들의 죽음을 지켜본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정화되게 한다. 죽음에 대한 지혜와 용기를 나에게 선사해 준다. 그리하여 두 친구를 추억할 때만큼은, 나는 한 번도, 죽음으로 인해 인생이라는 것이 초라해 보인적이 없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