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봄은 온다
김태범
세상이 멈춰 버린 봄날
홀로 텃밭으로 나와
부지런히 이랑 들이고
포근하게 비닐 씌워
한 알 한 알 옥수수 심었다
사월의 찬바람은
자꾸만 봄날을 희롱하지만
이랑 속 한여름의 꿈은
하루가 다르게 어둠을 뚫는다
바람의 심술에 애태우며
몇 날 잠을 설치다가
기어이 어둠을 박차고
말끔하게 눈을 뜬
새 아침의 환희를 본다
코로나로
빼앗긴 봄날이지만
그래도 봄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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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의 건망증
용케 찾았나 보다
삭풍에 눈발이 흩날리는데
배고픈 다람쥐 한 마리
마른 숲에서 낙엽 더미 뒤적이더니
꼼지락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다
용케 찾은 도토리 한 알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툭 투둑 가을이 떨어질 때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다니며
겨울 땀을 미리 흘린다
여기저기 열심히 곳간을 감춘다
자신만 아는 숨바꼭질이지만
다람쥐는 욕심이 없어서
건망증이 심하다
건망증에 버려진 곳간이지만
누군가의 배고픔을 채워 주고
따뜻한 봄날에는 새싹으로 돋아
숲을 더욱 울창하게 되돌려 준다
숲은 다람쥐의 건망증으로 울창하다
다람쥐의 건망증은 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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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독백
애당초 사람은 없었다
육지가 척박하다고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육지가 기름지다고
사람은 떠났고
다시 무인도가 되었다
다시는 사람이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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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모삼천지교鵲母三遷之敎
학교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비탈 참나무 우듬지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까치집 하나
몇 번을 옮겨
이곳에 둥지를 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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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달빛 하얗게 쏟아지면
그리움 하나
어찌할 수 없어
달빛 길 따라 그리움 달래 보지만
시린 달빛 하도 서러워
그리움 더욱 깊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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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범 시인의 시에는 긍정성의 철학이 가득하다.
김태범 시인이 지닌 긍정성의 철학은 식물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김태범 시인은 식물의 문법으로 시를 기술한다. 식물을 통해 우리 삶의 존재 양태를 드러내고, 식물에 빗대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식물에 투사한 시인의 의식은 시간의 문맥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지나간 시간을 망각하는 행위가 망명의 태도라면 김태범 시인은 오히려 지나간 시간을 소환하여 부활시킨다.
김태범 시인의 언어 감각은 파격을 통해 시적 언어미학을 성취했다. 이 시집을 통해 식물이 환기하는 추억의 시간, 생태주의적 시선, 그리고 시를 읽는 재미와 행간에서 불볕 땀을 뿜어 내는 상상력을 독자들도 함께 맛보길 기대한다.
-정연수의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