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로 서
전가은
비릿한 냄새가 난다
왈칵
쏟아진 육삭동이 양수
끌어올린 언덕바지
청매화 피었다
광목에 싸여 어디론가 사라졌던
애린 것이 아장아장 걸어와
물오름 달 아른거릴 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기억의 조각들
다부지게 꽃 피울 줄이야
햇살 다독이며 꽃잎
사이 오가던 노랑나비
한 마리
살포시 꽃잎인 양 어깨에 앉아 나부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통증
다섯 살 동생을 데리고 엄마가 떠나던 날
뒷산 비둘기
꾸륵꾸륵 울었다
참꽃은 피어 산기슭이 환하고
부드럽고 화창한 봄바람
나뭇가지를 감돌았다
재산이라고는
아버지 쌓아둔 도박판 빚더미
가진 것이라곤 똥밖에 없다 똥이라도 가져가라
빚쟁이들에게 호통치던 할머니
할머니가 되어
마디마다 울음 앉혀놓고
아파 아파하는 엄마 옆에서
나도 엄마 없이
꾸륵꾸륵 앓던
아홉 살의
봄
시큰거린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흔들리다
고요가 흔들린다
가깝고도 먼
벚나무
잎들이 나부끼는 창가
흔들려야 관계 맺을 수 있는
사이
새가 앉았다간 자리
철철이 바람 불고
새순이 돋고 꽃이 피었다
너와 내가 흔들리던 날
다정과 냉정 사이
새순이 돋고
꽃이 폈다 졌다
네가 흔들린 자리에서
내가
내가 흔들린 자리에서
네가
있다, 있었다, 있을 것이다
그렇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작은 것은 위대하다
고요가 흔들리는 날
발이 간지럽다
한없이 깊고 어두운
한 줌 밑에서
궁리의 시간이 싹트는
눈
세상에 나오는 일이
나를 반음 내려놓고
세상과 타협하는 까닭이었음을
솜털 같은 순이
솟아오르는 날에는
하늘도 고요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엄마와 딸
한 뼘 되는 나무에 제 키 만한 고추를 달고 붉어졌다
두둑 쌓고
멀칭 하고
구멍 뚫고
모종하며
고랑을 넓히려는 딸
고랑을 좁히려는 엄마
고랑 타는 사이
햇살이 뜨겁게 부채질한다
한 폭과 열두 폭
치마 사이에서
구멍을 좁혀야 할지 넓혀야 할지
실랑이하는 사이
고추가 붉어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삶의 이야기들이 펼쳐진 시집이다. 잊어버렸을 법한 것들, 흘려버렸을 법한 이야기들이 진지하게 혹은 심각하게 주제를 형성해 가면서 연결되어 있다.
한 편 한 편이 독립된 시이면서 전체를 관류하는 서사가 흐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정성을 챙기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쓴 시편들이다. 일테면 "과녁을 향해 비스듬히 누우면/눈들이 일제히 부풀어 올라요"(기울어지다) "납작한 잠들이 불쑥/일어나/바다로 가는 날"(眠할 수 있다면) 등에서 보듯 단조로운 리얼리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나름의 격조를 견지하면서 시의 예술성을 끌어올리고 있다.
-문효치 시인
전가은 시인의 언어는 상형이 아닌 형상이다. 그는 사물을 모사하지 않으며, 다만 사물에 침잠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풍경의 진지함과 익살스러움, 어딘지 모를 쓸쓸함과 아련함을 펼쳐놓는다.그의 언어는 형상-공간으로써 세계 속에 또 하나의 세계를 건축하는 정교하고 섬세한 손이다. 때문에 그에게 시는 언어의 개화와 함께 찾아 오는 근본 경험이 된다. 그의 생애가 온전히 밀착된 마치 정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원과도 같은,
-박성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