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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손으로 문을 여는 사람들에게-김고니 시집

김남권 2023. 11. 27. 09:21

숨질 5

김고니

한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때
그의 목덜미를 물지 않고
숨소리를 가만히 들을 수 있어야 해

꿈속을 걷고 있는 그가
심장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얼굴에 얼굴을 대고 같은 리듬으로 숭을 쉬어야 해

그의 숨이 내게로 조금씩 스여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의 심장이 뛸 때마다
그의 영혼이 연기처럼 숨결을 따라 내게로 올 때
어둠 속에서 그 순간을 바라보며 행복해진다면
너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숨이 하나가 되는
푸르고 붉은 영혼이
어둠 속에서 보라색 등불이 되어 가는 소리를 들을 때
긴 입맞춤의 밤이 시작되는 거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너의 이름을 알게 된 순간


어느 절에 바보 스님이 있었다
다른 스님들은 수많은 경전을 읽고 외우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는데
바보 스님은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바보라
경전을 읽어도 모르고 외울 수도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한숨을 쉬고 있는데
부처님께서 부르셨다
너는 오늘부터 단 두 글자만을 배우거라
할 수 있겠느냐
예, 부처님 제가 아무리 바보라도 두 글자야 모르겠습니까
그날부터 바보 스님은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절의 구석구석을 쓸며 글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워낙 바보인지라 두 글자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절은 깨끗해제 가고
다른 스님들이 읽고 외우는 경전은 늘어 갔다
어느 날, 마침내 글자를 알게 된 스님은 무릎을 쳤다
아, 이런 뜻이로구나!
바보 스님은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이치를 한꺼번에 깨닫게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시포스의 사랑


끝을 알 수 없는 무관심의 돌을 글리느라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짓눌려 버릴 무게가 두려워 잠들지도 못하는
새벽을 토해 낸다

지루해져 버린 책의 주인이
무심히 덮어 버리는 페이지였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면서
그 가벼움조차 감당할 수 없을까 봐 실눈을 뜨고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의 세상을 훔쳐보는 내가
종이보다 더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비겁한 아침

아무나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있었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성자처럼 두 팔을 벌리고 내게 달려오는 바람의 아이를 낳았던 그때
페이지를 넘길 때의 무게보다 더 아프게 소리를 내었던
세상의 모두를 사랑했던 마지막 순간

사랑은 돌처럼 아프게 나를 찢고
세상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사랑하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사람과
사랑하고 싶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마주 본다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의 언덕으로
마지막 돌을 밀어 올리면
그때, 다시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하고 싶다고 모두가 다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버지 나 이제 그만 울까요


아버지는 어릴 적 나를 공주라 불렀다, 평강 공주

얼마나 울었으면 그랬을까 싶다가도
아버지가 그렇게 불러서 진짜 울보가 된 건 아닐까
은근슬쩍 원망해 본다

바보 온달이한테 시집보낸다
그 말도 늘 함께였는데
온달이는 이미 오래전 죽었거든요, 하고 대답하면
강원도 가면 많다, 온달이 하며 웃으셨다

사위 안부를 물을 때도, 온달이는 잘 있냐 하시던
아버지가 그렇게 말해서 진짜 바보 같은 놈이랑 산다고
스리슬쩍 푸념을 했었다

울고 울고 또 울다 보니,
공주랑 온달이는 온데간데없고
웬 늙수그레한 아줌마만 덩그러니 남았는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세상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밖에 나갈 땐 눈만 내놓고
마스크를 써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래서 서로 눈만 바라보며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게 되는
그런 날이 올 줄이야

세상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만나서 밥 한 끼 먹는 것이 죄가 되어
서로 몸을 숨기며 살아갈 날이 올 줄이야
그래도 위로가 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세상에 이런 내가 될 줄이야
그토록 죽고 싶어 갈망하던 마음을 잊고
미치도록 살고 싶은 이런 날이 올 줄이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슬퍼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슬프다

다만 슬픔을 멈추는 법을 배웠다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처럼

-시인의 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