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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노래를 거둬갔으면-김창균 시집

김남권 2023. 11. 25. 06:58

쇠미역

김창균

당신의 어원을 오랫동안 따라가 봅니다
당신의 몸 어딘가에 녹이 맺혔을 법도 하여
안부를 물으려다 망설입니다
당신 속에 있는 색을 데쳐
추운 겨울 저녁상에 올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장날도 아닌데 좌판에 나와 있는 노인 몇은
하루 종일 겨울 볕에 미역 줄기처럼 말라 가고
겨울 해는 가난한 집 땟거리처럼 빨리 떨어집니다
밤을 기다려 처마 고드름은
누군가의 눈물을 받아 몸집을 불리는데
몸을 웅크린 몇몇은
이가 벌어져 바람이 제집 드나들듯 드나드는 방에서
위태로운 불빛처럼 밖으로 몸을 기울입니다
일찍 추위가 오는 북쪽 마을
구멍이 숭숭 뚫려 말문이 막히는
한번 들어온 바람은 출구를 찾지 못해
냉방에서 자신의 체온을 올리다 이내 주저앉고야마는
기막힌 날들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할복


찬 바람 일때
항구 쪽으로 이마를 맞댄 집에 사는 여자들은
저마다 항구에 나와 명태의 배를 가른다
먼 캄차카반도에서 온
비린내를 미처 털어 버리지 못한 저들의 배를 갈라
애간장을 들어낼 때
거기 굳어 버린 북녘의 바람과
비명도 같이 따라 나온다
얼어 버린 비명에 염장을 하며
눈물의 염도를 올리는 항구쪽 사람들

버릴 것이 없어 더 서러운
내장 없는 빈 몸이
작업복처럼 걸린 북쪽 항구

백 리를 갔다 온 사람이나
시오 리를 갔다 온 사람이나
복부에 깃들었던 신앙을
저녁 밥상에 올리며
말수를 줄이는 동안

속을 훤하게 드러낸 당신 위에
또 다른 당신들이 포개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북쪽


누군가 나에게
북쪽은 낡고 오래된 구식의 땅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북쪽을 내 몸에 들이고 오래 살았으므로
어느새 나는 북족이 되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종족 북족

북쪽의 장날은 북적인다
자동차 유리창을 조금 열어 바람을 맞으며 장 보러 가는데
인심 쓰듯 푸른 하늘 몇 점 먼 남쪽에 떠 있고

수신 상태 불량한 라디오 음악방송을 틀자
어느 종교 지도자는
'인간을 착취해서 번 더러운 돈은 헌금으로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말을 방송 진행자가 전한다

장에 닿자마자 파장 무렵인 골목
녹슨 뻥튀기 기계가
가래침 뱉듯 뻥!
마지막 뻥튀기를 뱉어낸다

휘적휘적 골목을 걷던 술 취한 노인들의 고막이
신나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들어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래 몇 알


추석 무렵 엄마 산소 옆에서 주워 온 가래 몇 알
하도 만지작거려서 모서리는 닳고 깊은 주름만 남았다
때 타고 시간 타고 사람도 타고
그 숱한 기척에도 몸을 열지 않는 단단한 고집이
살아생전 엄마의 속내 같기도 하여
양손에 넣고 서로의 몸을 비벼본다
그 소리가 맑고 경쾌하여
저간의 침묵을 깨고도 남을 법한데
주름이 주름을 비비며 닳는 몸과
또 한 주름진 몸이 하는 골똘한 생각은
어디쯤 가 닿고 있는지
병을 대물림하는 혈육의 맥박처럼 간헐적인
서러움을 밀며 또 당기며
모서리가 많던 집을 돌이켜 생각해 보는
캄캄한 저녁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잃어버린 소읍


버스를 잡아 두던 터미널은 폐허
가출의 시작이던 간이 정거장도 폐허
당신이 나를 배웅하던 수많은 날들도
그 눈물도 폐허
꽃이 피면 몸에 붙은 몹쓸 병도 환하게 가시고
토종 꽃 떠난 자리
이국의 꽃 만발하였다기에
당신의 안부를 겨우 생각해 보는데
도시의 한쪽을 밀며 그치지 않고 퇴화하는 시간표들
난시의 눈으로 보는 이정표들

나는 도시의 한 모퉁이에서
가끔 시간을 염색하거나 탈색하며
저녁이면 마음을 다친 수많은 이별을 배차하며

거기, 거기서
내 안의 폐허가 네 안으로 옮겨갈 때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이별을 생각하기도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는 '북족北族'이다. '낡고 오래된 구식의 땅'에서 오래 산 사람, 더 정확하게는 '북쪽을 온몸에 들이고 오래 산'사람이다. 북쪽산의 까탈스러운 봄바람, 북쪽 바다의 까칠한 겨울바람에도 기꺼이 몸을 내주면서, 햇살 인색한 도시 한 귀퉁이에서 이따금씩 삶의 시간을 염색하거나 탈색하면서, 저녁이면 마음을 다친 크고 작은 수많은 이별을 정성껏 배차하면서, 밤이 깊으면 자신의 몸보다도 더 어둑한 저 크고 깊은 바다 '북명北溟'의 기척에도 귀를 내어 주면서, 그래도 여전히 남는 몸의 그늘을 슬퍼하면서, "꽃 피고 지는 일은/당신과 나의 바깥의 일"(꽃 피는 시절) 그래서 그는 "내 슬픔을 다 쓰고 또/누군가의 슬픔을 빌려다 쓰"(빌려 쓴 슬픔)는 사람, 남방의 동백꽃까지 빌려다 슬픔의 시를 쓰고야 마는 북방의 시인, 한사코 낡고 오래된 슬픔을 온몸에 들이고 살아가는 '북족의 서정 시인'이다.
-심재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