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풀꽃
임승훈
언덕배기 자갈길 돌아
잡초와 가시덤불 사이에서
배냇짓하는 손녀의 작은 눈꽃
가시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등을 다독거려 주는 산들바람에
햇살이 따라 들어와 웃고 있다
얼굴이 작아서 앙증맞은
외꽃같은 고향초
천연덕스럽게 졸고 있다가
안 그런 척 고개 숙이고 있네
작은 씨방에 숨어있던
꽃술이 마중나와
햇살의 웃음을 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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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끝에서
곧게 뻗어 있는 나무마다
흘러내린 눈물 자국
상처 난 자리
멍울 자국에 매달린 은방울
거두지 못한 아픔이 눈물이 되어
햇살에 반짝인다
바람 부는 날에는 가루로 날아서
수정하는 날
나비처럼 멀리 날아가는 날
그날을 기다리는 나무
잣 익어가는 콩트 소리에
솔방울에 다가가는 다람쥐
귀를 쫑긋 세워 엿듣고 있다
단단한 솔방울 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백 여 개의 뽀얀 눈동자들
아직도 어미젖을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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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지켜야 할 일. 1
십오 년 만에
장롱 서랍장 밑바닥에서 찾아낸
아내의 얼굴 자국
먼지 먹은 원고지와 눈물 먹은 일기장 속에
그녀의 혼불이 살아 있었다
깨알 손글씨에
민낯을 드러낸 아내의 얼굴
긴 병마에 멍든 아픔이 일기장에 남아 있고
두 아이의 사연이 눈가에 멍울져 있었다
밀물과 썰물에 밀려갔다 밀려오는
그녀의 숨겨진 그림자 일기
읽어보고 또 읽어 본다
나는 갯벌에 나와
물을 찾아 떠도는 물새
상처 난 외눈으로 아내의 눈물을
먹고 있는 눈물 새
무정하고 무심한 나비 꽃 당신
그래도 당신이 남기고 간
꼭 지켜야 할 일을 또 다시 보고
상처 난 세얼을 다시 꿰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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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꼭, 지켜야 할 일'은 소멸을 향해 가는 존재의 의미를 묻고 모든 존재가 함유하고 있는 에너지인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관찰의 기록이다.
가부장적인 사회제도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세세한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시간을 살아왔던 까닭에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임승훈 시인도 이제야 자연에 대해. 가족에 대해 그리고 사랑과 이별에 대해 곡진한 노래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추억이 늘어나고 경험이 깊어진다고 해서
삶의 혜안이 밝아지는 것은 아니다.
시집 꼭 지켜야 할 일은 오히려 축적된 추억 속에서 휘발되지 않은 생명의 소멸을 다시 소환하여 슬픔을 환기함으로서 앞으로의 남은 삶의 꿈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