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홍일표
빛을 탕진한 저녁노을은 누구의 혀인지
불붙어 타오르다 어둠과 연대한 마음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느 계절의 무덤인지
돌의 살점을 떼어 낸 자리에 묻혀 숨 쉬지 않는 문자들
하늘을 돌아서서
흐르는 강물에 몸 담그고 돌멩이 같은 발을 씻는다
밤새 걸어온 새벽의 어두운 발목이 맑아질 때까지
딛고 오르던 모국어를 버리고
맨발로 걸어와 불을 밝히는 장미
몇 번의 생을 거듭하며
붉은 글자들이 줄줄이 색을 지우고 공중의 구름을 중얼거리며 흩어진다
마음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이 쓸쓸해지는 해 질 녘
걸음이 빨라진 가을이 서둘러 입을 닫는다
뼈도 살도 없이
오래된 이름을 내려놓고 날아가는 구름
비누 거품 같은 바람의 살갗이라고 한다
허공을 가늘게 꼬아 휘파람 부는 찌르레기
입술이 보이지 않아 아득하다는 말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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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강
오래전에 죽은 사내가 떠내려가고 있다
어느 검은 지층에서 흘러나온 표정인지
마지막으로 본 희미한 빛을 물어뜯고 죽은
시커멓게 타 버린 노래들
검은 강물 위를 흘러간다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말이 되지 못한 돌멩이들만 바닥에 박혀 있다
언젠가부터 강가에는 목이 없는 새들이 숨어 산다
조각조각 깨져 강물 위에서 희뜩이는 목소리들
흑백영화 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단칸방에서 홀로 숨을 거둔 그는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흘러간다
술병들이 굴러가고
죽은 태양이 굴러가고
아무도 오지 않는 빈방이 굴러가고
환한 대낮인데
저녁은 아직 멀었는데
카페의 늙은 악사는 이곳에 없는 봄을 연주한다
저무는 해는 팔다리가 없는 고독을 증언하고
강물은 봄의 악보를 받아 적으며 중얼중얼 흘러간다
매일 걷던 길인데
중저음의 재즈처럼 낮고 천천히 흐르는 강물이 왜
검은빛이었는지
한쪽 눈을 가진 사람들이 왜 어둠뿐인 밤의 짧은 생을 수장시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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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外傳
눈을 감아 봐
빗소리를 데리고 비가 오잖아
비가 그치면
빗소리는 어디 가나
눈을 떠도
여기는 칼바위 오르는 길
조금 전의 심장
조금 전의 빗소리와 함께
북한산 어디쯤
산 아래 초등학교 앞에서
솜사탕으로 빚은 구름 한 송이
한입 한입 베어 먹는 아이들
와와, 훗날은 점점 부풀어 올라
달콤해지지
기어코 구름이 아이들을 삼키는 날이 오지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 마
너는 밤마다 망명 중이라고
반딧불이처럼 어디론가 깜박깜박 신호를 보내는 중이라고
몸의 불을 끄고
어둠도 몰라보는 어둠이 되는 순간
너는, 너의 미래는 반짝 눈을 뜨지
김수영이 끌고 가던 더럽고 냄새나는 골목 어느 귀퉁이에서
크고 둥근 하늘이 타전하는
빗방울 문자들
사방으로 흩어져
방금 스쳐간 공중의 인기척처럼
빗소리와 더불어 총총히 사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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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그머니
허공의 틈새에 슬그머니 몸을 밀어넣는 새가 보인다
술값을 내고 슬며시 사라지듯
부고도 없이
혼자 살던 친구가 갔다
픽션처럼
꿈속의 꿈처럼
슬그머니
개운산공원에 서서 본다
먼 하늘 한 모퉁이에서 스스로를 지우며 아득해지는
새의 행방을
그가 떠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고
발자국도 무덤도 없이
슬그머니
구름이 짓고 허무는 마음의 자리에 새들이 와서 지저귄다
오래 날이 저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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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시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문자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사물과 존재들이 뱉어 내는 말, 해석되지 않고 문장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세계의 맨얼굴을 붙들어 보려는 과정을 시로 쓴다.
섬세한 관찰과 정교한 묘사는 워낙 시인의 특징이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온몸의 감각기관을 재배치하여 세계의 감각기관과 조응하려는 몸짓이 더욱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살아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전의 심장은 안이 밖에서 출렁이는 존재자들이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입으로 말한 것. 마음으로 보여준 것을 증언하려는 시인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오연경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