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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달을 훔쳐 보다-강나루 시집

김남권 2023. 7. 4. 10:13

새싹비

강나루

봄을 알리는
비가 내린다

산과 계곡과 강가의
마른 풀들이 빗방울 흠뻑 머금은 채
온 힘을 다해
대지를 촉촉이 적신다

이 비 지나고 나면 땅과 하늘이 요동치며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던 틈바구니에서
봄을 화려하게 장식할 생명의 푸른 피가
넘실거릴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너를 기다리는 시간


가을을 놓치고 간
동강의 굽이치는 능선 자락이
얼마 전 재 입대 한다고 찾아온
삭발한 청년의 짧은 머리카락처럼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잎새는 지고 없다
나뭇가지마다
붉게 시린 눈망울이
허전한 강물 너머를 응시하고

노을만 바라보던 초저녁 달은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느냐"고
안부를 물어온다

너를 기다린 시간이
저물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멍 때리기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본다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햇살이 비처럼 쏟아진다
구름 한 점 없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달을 훔쳐 보다


'중천에 째지게 걸린
시뻘건 둥근 달'
시인의
어머니를 불러온 달,
그 달이 궁금해
천체망원경을 샀다

망원경에 비친 둥근 달은
황금빛으로 이글거리며
사십육억 년 세월에 생채기를 내고
여기저기 움푹 패인
고단한 달을 훔쳐봤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봄의 소나타


청령포로 213번 길,
봄비가 내린다

새벽을
지키고 서 있던 가로등은
상젤리에 보다 더 빛나는
무대를 만들어 놓았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빛나는 가로등 불빛은
늦은 저녁부터 내리는 빗줄기와 함께
바람의 비트에 맞춰 왈츠를 춘다

강한 비트에 끌려온 바람은
가로등 불빛을 빗방울로 발라 먹고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이겨 낸
시간의 기억이 계절을 끌어 안았다

경칩까지는 보름도 더 남았는데
차가운 대지에
뜨거운 입맞춤을 하고
봄 햇살을 숨죽여 기다린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모든 예술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가질 때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문학 장르 중 시가 더더욱 조작되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다면 시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시를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를 읽는 즐거움은 충분할 것이고, 시의 존재 이유가 될 것입니다. 강나루 시인의 시는 충분히 인간적인 모습을 내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문철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