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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숲, 정자 하나-구재기 시집

김남권 2025. 2. 28. 08:34

파문

구재기

물가의 나무는
조금씩 슬퍼졌다
자꾸만 흔들리는 제 모습에
마냥 슬퍼졌다
햇살 눈부신 아침이 오자
물낯으로 떨어지는
나무의 굵은 눈물
물낯으로 끊임없이 번지는
그 눈물의 파문
햇살이 먼저 흔들렸다
하늘도 구름과
함께 내려와 흔들렸다
온 세상이
한곳에 퍼져
모여, 어른어른
물가의 나무와 함께
파문을 일으켰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곡선의 향기

어두운 새벽에
굽은 길을 간다
바람은 아주 부드럽다
걷는 길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 바람속에
부드러운 향기가 있다
곡선의 향기
그렇다, 똑바로 마음을 가려
곧은 길로만 가야 한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떠 있는 구름은
본래부터 서 있을 곳이
없었던 것, 길가 샘물에 들어
몸을 씻고 있다
아무리 깨끗한 물이래도
흐린 물을 씻어내다 보면
절로 흐려지는 법
내 마음이 아닌 것은
언제나 흔들려 흐려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도 따라서 흔들린다
곡선으로 가는 길
곁에 선 돌부처 하나
어둠을 벗어내며 서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솔숲, 정자 하나

어느 쪽으로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데
어디에선가 솔바람 한 줌 다가왔다
이 생각 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사는 것
지금 어디서 와서
무엇 하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젖어들다 보면
아파트를 울타리로 하고
솔숲에 내려앉은 솔 그림자에
솔잎이 하나둘, 온전히 밟히고 있다
솔솦의 정자 하나, 한밤의 달빛으로
그림자를 내려놓고 있다
솔솔 피워 올리는 솔잎 향기
이제는 일상처럼 들려오는
친구들의 사망 소식에 향불을 피워 올리듯
숨가쁘게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이름처럼 이름하며 살아가기가 그리도 어렵다
솔숲의 정자 이름은
당연지사, 제 이름값 하는
월송정月松亭
한참을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초심으로 돌아가려는데
새로 태어나는 길은 보이지 않고
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솔숲 솔나무 솔잎 위에서 반짝이던
달빛 하나, 시리도록
곱게 단장을 하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를 쓰면서 시작되는 고민 중의 하나는 어떤 언어를 시어로 선택하여 한편의 시로 이끌어갈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그것은 시어가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일상어와 쉽게 구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상어가 시에 쓰이면 곧 시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잡초와 야생화를 굳이 구별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시의 언어는 일상어의 꽃이다. 잡초와 같이 왕성하게 자라난 일상어가 시어로 등장하면 야생화처럼 피워낸 꽃이 된다. 이른바 일상어에서 발전을 거듭하면 시에 있어서의 시어가 된다. 일상생활에서 책임을 통하여 이어받은 언어는 기술이나 지식 따위를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더 높을 정도로 다시 새로운 발전을 거듭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언어의 힘이다. 바로 시어가 가지는 위대한 힘이다.
-시인의 산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