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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 끄다, 물에 타오르다-이혜선 시집

김남권 2024. 9. 14. 10:21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혜선

딸을 팔고 백원을 받은 그 엄마, 뛰어가 빵을 사 와서 입에 넣어주며 '평생 배 곯린 것 용서해라' 통곡했다지요 어떤 아이는 날마다 풀죽만 먹다가 생일날 아침 흰밥 한 그릇 앞에 놓고 그건 밥이 아니라고 '밥 달라' 울었다지요 풀죽을 밥으로 알고 사는 그 아이들, 풀죽도 못 먹어 맥없이 죽어가는 아이들, (어린 새끼들 굶어 죽는 것 차마 볼 수 없어, 목숨 걸고 국경 넘어 온 새 나라 새 땅, 거기선 또 어떤 커다란 입이 벌리고 있나요?)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 나온 것 미안하다 살 빼려고 비지땀 흘리며 사우나에 들어앉아 미안하다 먹다가 내 배부르다고 날마다 쓰레기통에 음식 버려 미안하다 같은 하늘 같은 핏줄 형제들 굶어 죽어도 모른 척해 미안하다 혼자만 뜨신 방에 단잠 자서 미안하다 달려가서 밥이며 약이며 쥐여주고 싶어도 가지 못해 미안하다 이유가 많아서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말만 해서 더 미안하다

*북한 출신 장진성의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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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不二, 번져온다

좁은 산길 오르다가 가느른 나뭇가지 하나 꺾였다

툭! 부러지는 순간

찢어진 지층 틈새에서

파랗게 물오른 눈동자 하나, 비명을 지른다

온 산 나무들이 아픔에 몸을 비튼다

우주 심장에 푸른 핏물

빠르게 번져간다

툭! 나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온몸 핏줄 따라

불이, 번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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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 택배

구례 사는 후배가 택배를 보내왔다

울안의 앵두 매실 머위대도 따지 못했어요 콩은 밭에서 콩깍지가 터졌고 고구마 두 이랑은 살얼음 낀 뒤에야 캐었답니다 감 몇 개 그대로 까치밥이 되고 밤은 쥐들 먹이가, 대추와 산수유는 새들 먹이가 되었어요 그래서 제 집 남새밭에는 언제나 새들 지저귀는 소리 끊이지 않아요

상자를 여니 서리 맞은 누런 호박 한 개와 대추가 들어 있었다 고구마 여남은 개와 주황색 감이 남새밭과 감나무를 데리고 들어 있었다 바삐 통통거리는 그녀 발소리 속에 내년 봄에 핀 산수유 꽃망울도 질세라 연노랑 하늘을 서둘러 열고 있었다

빈 상자 속에서 또롱또롱 새소리가 방울방울 튀어나왔다 뒤이어 지리산이 큰 걸음으로 걸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