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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둠스데이-문정영 시집

김남권 2024. 9. 3. 08:38

술의 둠스데이

문정영

매일 술을 조금씩 먹고 자랐다

서른 마흔 나이 먹으면서, 좁은 이마에 띠를 두르고 달리기하면서

술병 뒤에 숨어 독작하였다

어떤 것이 사라질까 두렵지 않다, 술잔에 이야기하였다

폭음을 싫어한다는 말에 꽃잎이 혼자 웃었다

지구의 종말은 비둘기가 먼저 알 거야

뱉어놓은 술 찌꺼기를 가장 많이 먹는 짐승은 위대하니까

간에서 자라는 물혹들이 가끔 물었다

내가 자란 만큼 술은 사라졌는가, 아니 빙하가 녹는 속도를 묻는 게 빠를지 몰라

불안한 공기를 뱉으며 키가 줄었다

몸속에 들어와 숨쉬기 곤란한 질문이 이별이었을까

저녁을 감싸고 있는 술잔들이 따듯해졌다

좀 더 놓아버릴 것들을 찾아야겠다고 실언했다

더는 당신이라는 말을 술병에 담지 않겠다고

자정 지나 혼잣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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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유령들

잎사귀들 몸 겹치는 소리가 종의 좁은 입구를 흔드네

그 길 따라 비의 거친 숨소리 떠 가고

누군가의 울음에 조금씩 옅어져 가는 립스틱이 묻어 있네

몸 비틀며 신음을 참아낸 꽃술이 여물어 갈 때

어떤 악기는 가시가 있는 자정 같아서 손이 닿으면 튕기네

안개에 젖은 꽃잎은 무늬가 선명하지

선명한 것들은 피아노의 검은 건반을 두드리는 긴 손가락 같은 것

그 사이에서 흐르는 또 다른 음순의 선율들

당신 없는 페이지에 명랑함은 사라지고 배웅이라는 글자가 남아있네

울퉁불퉁한 리듬이 있을까, 불빛을 잠그고 나눈 사랑처럼

우아하다는 말은 이별 뒤에 쓴 손편지

나는 침묵을 감는다, 당신을 유령이라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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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비

저 가벼운 몸에 우주의 농담이 있다

구겨진 휴지 같은 너는 햇살을 허기로 적는다

절절하게 내려앉은 꽃의 입구가 붉었다는 기억

시들지 않기 위해 꽃대에서 끌어올린 수액들

저 꽃이 지지 않았으니 너는 다시 봄으로 날 수 있다!

'겨울나기 위해 날개를 말려야 해' '농담해'

들어올려 본 것 중 가장 가벼운 꽃그늘 속에

너의 허기가 가라앉아 있다

한때의 환희를 너의 가는 다리가 매달고 있다

꽃의 배꼽에서 날개를 접었다 펴는 상상

겨울 폭풍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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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의 시는 삶의  찰나를 응시하며 쓴 서정적 이야기다. 혼잣말이다. 따뜻한 물음이고 뼈 아픈 실언이다. 그는 기억이나 감정을 날실과 올실 삼아 삶의 비밀을 직조한다. 어디에도 거짓과 허장성세가 없다. 올곧고 정직하다. '저어, 저어새' '탄소 발자국' 같은 시는 깊은 관조의 시선이 도드라진다. 시집에는 이런 매혹적 인수작들이 풀숲에 머리를 처박은 꿩같이 숨어 있어 있어 읽는 기쁨을 선사한다.
-장석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