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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이물감-이성렬 시산문집

김남권 2024. 12. 28. 09:40

기린 여관

이성렬

이곳에 기린은 없다. 이 퀴퀴한 방에서 만날 수 있는 짐승은 팔각 성냥갑 측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쌍봉낙타 한 마리뿐,

이곳에 기린은 없다. 나는 오래전 철길 건너 살던, 목이 긴 젊은 과부를 추억할 수 있겠다. 야식 주문을 기다리는 골목 안 식당, 창밖으로 빠져나온 연통의 기침소리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여관 주인은 나른한 오후에 본 <동물의 왕국>, 맹수에 잡아 먹히는 기린의 우아한 보행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일까, 그저 즐겨 읽는 소설의 제목을 따 온 것일까

기린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면, 주인은 지하 납골당을 찾으라고 충고할 듯하다. 그러니까 여기 오기 전에 기린을 만나든지, 아니면 내일 무간無間으로 가든지 하라고, 퉁명스럽게,

어쩌면 이 집의 상호는 <기린-여관>일지 모느겠다고, 누군가 이른 아침 크게 깨달은 듯 고개를 주억이며 퇴실할 때에, 주인은 뜯어 먹히기 직전의 포유류처럼 네 발을 모은 자세로 잠들어 있을 뿐,

이곳에 기린은 없다, 다만 곤한 잠에 빠진 그의 숨은 샘물이 낮은 곳으로 넘쳐, 선하고 길한 동물의 형상을 베개에 수 놓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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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단정들은 너무 검고 평평하다.
나의 초라함에 대해 그 무엇에게도 불평하지 않는다. 도처에 입 벌린 공중 맨홀들, 서둘러 사라지는 행성들의 뒤통수, 스치는 사물들의 궤적에 고인 그늘을 어찌하랴, 어두운 대기에 입 맞춘, 쓰디쓴 기억만을 여기 남길 뿐,
-작가의 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