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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 빠진 독에 물 붓기-김노을 시집

김남권 2024. 10. 27. 12:54

묵은 계절을 굽는다

김노을 

가을 추수가 시작되면
대나무 발이 갯벌 바다를 향해 줄서기를 한다

밀물과 썰물은 백일동안
대나무 발 사이를 수런수런 드나든다

동지가 지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풀어헤친 여인의 머릿결처럼

차가운 물결 위를 일렁이는
물김 생김 날김들

어기야 둥둥 노 저어라
어기야 둥둥 노래하라

밥이 되고 책이 되고 삶이되는
춤추는 김이 날아들 수 있게

숭고한 자연 갯벌 바다여
불화로에 김을 굽듯

반백년의
묵은 계절을 굽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추억의 문장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아닙니다

민트차를 석 잔 마셨을 뿐인데
어둠의 문장을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세월의 기억을 소환해
예닐곱 여자 아이의 꿈도 그려넣고

새하얀 카라에
검정 교복을 입었던
소녀의 꿈도 그려 넣었습니다

이제 갈빛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
여인의 옷자락을 그려넣을 때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꿈쟁이의 꿈

 
별을 타고 날아올라
우주로 소풍가는 꿈을 꿨던
예닐곱 아이가 있었습니다

꿈꾸던 어린 시절에
집안 뜨락에서
사랑의 온도를 알아버렸다네

꿈을 찾던 소년은
우주를 향해 꿈 여행을 떠납니다

눈앞에 잡힐 듯 잡힐 듯
꿈 너머 꿈인 신기루 너머

드디어
별 마루에 올라

넓은 세상을 향해
두 팔 벌려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상사화

 
목이 긴
그리움 어이할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대여

 

함께 시작해
홀로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걸어가다 보면
길에서 벗을 만나고
깨달음도 얻을 것이다

예수와 부처가
길에서 깨달음을 얻었듯이

홀로 걸어가다 보면
누군가와 함께하는 순간도
축복처럼 찾아 올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인을 다른 말로 하면 비유와 사유를 먹고 사는 영혼이라고 할 것이다. 비유와 사유를 오래된 가마솥에서 뭉근하게 쪄내면 언어가 탱글탱글하게 감칠맛이 나고, 쫀득쫀득한 찰기로 입안에 착착 붙는 고소함을 전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수천 번의 퇴고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시인이 처음 맞닥뜨린 영감을 언어로 기록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사유를 반복하며 가장 적절한 비유와 상징을 찾아내고, 언어가 완벽한 그림이 그려지기까지 이미지를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최고의 순간이다.

언어가 구수하게 익어가고 모락모락 김이 나기 시작하면 한 편의 시는 비로소 날개를 펼치고 비상할 준비를 마치게 된다. 시인의 고뇌가 독자를 만날 최종적인 시간이 다가왔음을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하게 된다. 시 ‘언제쯤 익어갈까?’는 김노을의 시에 대한 진정성이 담긴 솔직한 자기반성이자 고해성사다. 이번 시집을 통해 김노을이 자기 빛깔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먹구름 속에서도 자기만의 별빛을 찾아가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숨죽인 기다림의 순간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남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