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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금시아 시집

김남권 2024. 10. 7. 17:51

노을을 캐다

금시아

새빨갛게 물든 한 폭의 안골포
저녁 해가 횃불처럼 포구를 밝히는 동안
바다와 갯벌 그 배접 끝에서
노부부가
노을을 캐고 있다

늙은 아내가 호미로 한 움큼씩 노을을 캐내면
노인은 깜짝 놀라 입을 꼭 다문 노을을
얼른 망에 주워 담는다
횃불이 사그라지기 전에
딱 하루만큼만 채운 노을 자루를
비척비척 밀며 끌며 가는 노부부의
느리고 굼뜬 실루엣,
저리 더딘데 어느새 이리 멀리 왔을까

캐낸다는 것은
자벌레처럼
수없이 구부정한 허리를 폈다가 구부리는 수행
생채기 덧나고 덧나 굳은살 박인
오체투지 같은 것

끝없는 이야기처럼
막다른 아픔과 적막한 슬픔이 물든
안골포의 하루 퇴장하면
호밋자루처럼 접힌 노부부의 긴 그림자
가로등 환한 언덕을
달팽이처럼 기어 올라간다

큰 대야 속의 노을
뻐끔뻐끔 밭은 잠을 해감하는 동안
밤새 칠흑 같은 갯벌은 두근두근 여울지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여름을 잃어버린 사람

사람이 나간 사람 속에는 한동안
화가 난 사람이 살고 있네

사람이 빠져나간 사람의 여름을 열어보면
뙤약볕과 짙은 그늘에는
술 취한 오후가 널브러져 있고
시들한 고추밭과 빈둥거리는 마당이
나뒹굴거나 내팽개쳐져 있었네
우기는 다정하다가도 저녁이면
툭 잘린 낭떠러지처럼 멀어졌고
화는 메마른 땅에서도 무럭무럭 자랐네
졸린 여름은 가물고 허기져서
보기에 축 처져 있는 것 같았지만
화의 체감온도 높아지면
무성하게 자란 주정과 허방이
곰국처럼 끓었네
여름을 잃어버린 사람은
화가 많아 허술한 사람
땡볕에서도 눈 빠진 새벽을 껴안고
텅 빈 겨울 속을 뒹구는 사람
그저 한 사람이 빠져나갔을 뿐인데

사람 속에 들거나 사람을 들이는 일
참 지극하고 허술한 일이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봄밤
-유정에게

꽃샘 추위, 불청객처럼 들락거린다

봄밤이 운다 겨우내
핏기도 없이 파르스름하던 산동백 꽃눈
일찌감치 뭉툭하고 여린
쇄골에서부터 터져 나오는데

삼 년 전,
활짝 핀 노란 동백꽃 꺾어와
초록 유리병에 가두었지
초록 속에서는 나를 숨기기 좋았지
살그머니 껴안고 기다림 열어보니

어쩌나, 새빨간 울음이라니

꽃피우고 싶어 꽃피고 싶어
꽃샘추위처럼 토해내던 화병火病
새빨간 동백꽃주 한 잔 기울이니
찰랑찰랑 폭설에 고립된 봄밤
젊디젊은 이야기 노랗게 짓무르는 봄밤

까닭도 없이 눈시울 두근거린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금시아의 시에선 한곳에 온전히 정주하지 못한 자의 슬픔이 만져진다. 한 발은 땅에, 한 발은 물에 담근 채 끊임없이 "물밑 세상의 쓸쓸함"과 유통기한이 지난 그리움을 수시로 길어 올린다. 힘의 균형이 물 위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땅 위에 있을 때도 범람, 우기, 물길, 수심, 소낙비, 같은 물기 머금은 시어가 출몰한다. 물과 동행하지만 쉽게 울지는 않는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감정"에 "오래라는 천연 방부제"를 집어 넣고 휘휘 저어 투명해질 때까지 숨죽여 기다린다. 그런 투명한 기다림으로 "물의 심장 소리를 읽"어내고.  "수면을 쓰윽 베어 구름 내장을 훔쳐 달아"나고 "공중을 빨갛게 물들"인다. 금시아의 시가 감정의 절제와 사유의 깊이뿐이니라 "가장 긴 유효기간"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김정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