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표현하는 사람들-시표동인

김남권 2025. 5. 26. 07:23

눈을 깜빡거려 봐

문진희

병실에 누워있는 너에게로 가는 길은 제한 속도가 없다
가로등의 눈이 짓무르고
십자가 어깨 위로 달이 떠오르면
병실 안 알전구도 촉촉한 눈망울을 하고 있다
어느새 침상에 누운 너의 새는 날개를 접고
하루의 목숨을 뱉는다

의사선생님이 마법사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밤마다 모자를 나에게 선물할 텐데
그 모자에 별도 달려 있겠지

모두가 플라스틱 코끼리를 키우고 목소리를 낮추는 병실 안에서 오늘따라 목걸이가 나를 조여온다

조금 있으면 또 하나의 달이 뜰것이다
새가 되고 싶은 고양이는 노을을 깨뜨릴 것이고

너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묻고
너의 잠에 나의 잠을 보태본다

바람이 밤새 바느질을 하는 동안
싹틔운 희망이 꼬물거리며 하품을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눈을 만지다

신미애

손바닥에 눈을 올려놓은 순간
짜르르 손바닥을 타고 가슴을 관통하는
이 냉기는 깨진 사랑의 감촉
오래전 어긋난 약속처럼 선명한 통증
형체도 향기도 없지만
칼에 베인 듯 또렷이 기억을 깨운다
온몸을 휘감던 설렘이 희미해지고
손목으로 차오르는 서늘한 느낌
식어가는 가슴을 흔들던 지난 겨울의 기억들,
남은 햇살에 젖은 마음 쬐며 이곳까지 왔다

내 사랑의 구성은 허무함으로 이루어졌다
손바닥에 앉았던 하얀 몸은 흔적없이 녹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남아 있는 물기는 오랜 침묵 같다
나는 잠시 슬픔을 껴입고
눈 내리는 그날을 향해 걸어간다
오래된 이름이 내 무릎까지 차오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이도훈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어제도 아니고 먼 미래도 아닌
1억 몇천만 년 전으로 걸어간
이족보행이 발견되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어떤 자연은 분명,
보관할 만한 흔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득한 시간의 과정은 늘 저 앞에 소멸이 있고
대신 뒤에 그 흔적을 남겨놓는다
1억만 년은 어느 쪽이었을까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한,

시간은 편도가 없다

어제 텃밭에 디딘 내 발자국도
간밤에 내린 빗방울도
1억 몇천만 년 동안 반복되었다

오랫동안 보관된 빗방울 자국에선
소나기 소리가 들렸고
아침 희뿌연 안개가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맨 앞서 걷던 발자국 하나가 뒤를 돌아본다
성큼 내딛는 발자국 따라
1억만 년 전의 발 딛음,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