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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는 꽃이다-박여롬 시집

김남권 2024. 12. 31. 09:11

메밀꽃밭에 끌렸다

박여롬

메밀꽃 하얀 물결에
세상 먼지 묻은 발을 살짝
내미는데 그만 그 여리고 붉은 대궁 앞에
미안함이 앞선다

염치도 없이 사진을 찍었다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한 그 꽃밭 한가운데로
백 년 전의 소설가는
오늘의 작가들을 초청했다

시를 쓰고
동화를 쓰는 사람들이
메밀꽃밭의 흰 물살에 기대어 출렁거렸다
얼룩진 사람들을 씻기고
털어 말려주고 있었다

메밀꽃밭으로 나를 데려간 남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아침과
별이 사라진 새벽을
추겨세우며
메밀꽃 하얀 물살을
온몸으로 쓸어 담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맨발이 걱정이다

매일 아침, 맨발로 산에 올랐다
어떤 기대가 가득했었다
아프던 발바닥이 아물고
다시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한겨울을 지나서 다시 산에 오를 때는
맨발의 용사가 된 사람들로 북적댔다
나만의 기대는 온데간데없이
마음은 식어버리고
뒤처진 발걸음에 몹쓸 핑계만 늘어났다

맨발의 열풍을 타고
산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산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열정이 식고 나니
산이 걱정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동안'

오랜 기억의 끈은
명주실 가닥처럼 가늘지만
단단하기도 하지

딸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옆집 아이가 춘천으로 이사를 갔고
갑자기 준비도 없이 따라가서는
일주일을 신나게 지내다 왔다
매일 써야 하는 일기를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더니
아이는 제목, '그동안'
그렇게 한 페이지로 일주일 치를
명쾌하게 끝없던 일이 있었다

한 줄의 이야기 속으로
흘러 들어가다 보면
새 열매, 묵은 열매가 공존하는
조화로움이 기쁘다
그동안, 은 씨줄 날줄로 잘 짜여진
짙은 삶의 원단을 펼쳐 놓은
신의 한 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박여롬의 시편들에서는 인간적인 면모가 풀과 나무와 달과 별의 이름을 빌려 오롯하게 날개를 펴고 있다. 산자락에 기대어 살고 있는 그녀의 몸에서도 풀꽃 냄새가 나는 것처럼, 시의 행간 곳곳에서도 나무와 풀과 바람과 물냄새가 진하게 배여 있다. 한 마디로 박여롬의 시에서는 진솔한 삶의 흔적들이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어떠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연 속에서 인간을 향한 아가페의 삶은 무엇을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지, 비우고 채우는 일은 또 무엇으로부터 오는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김남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