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며
권수진
향유고래라 부르기도 하고 말향고래라고도 했다
잠시 한눈팔면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마는 거친 난바다에서
부유하는 섬처럼 떠돌았다
고래 심줄처럼 질긴 사랑을 놓지 못했다
서로 지향하는 길이 달라서
너는 뭍으로 진화하고, 나는 지금도 신생대 어디쯤 머물러 있다
몇 헤르츠로 주파수를 맞추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다
고래가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를 때까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등대지기
스스로 유배지를 자처하며 고립무원으로 사는 이들이 있다
인적이 드물수록 절해고도의 비경은 장관을 이루었다
바람을 타고 흘러온 홀씨들이 외딴섬 곳곳에 뿌리내린 곳
기암절벽 사이로 갈매기 떼 날아와 둥지를 틀고 있었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때가 되면 저절로 피는 것이 꽃의 방식이라면
밤마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등대의 일이었다
출항을 앞둔 배들이 만선을 염원하는 뱃고동 소리를 길게 내뿜고 있다
바다는 파란만장한 우리네 인생 같아서
잔물결 속에서도 거센 풍랑이 일고, 파도는 멈추는 법을 몰랐다
저 멀리 고단한 여정을 마친 고기 떼가 다시 섬으로 밀려오기 시작하면
망망대해 표류하던 내 삶도 점등인의 별이 되어 깜빡거렸다
바다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코스모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곧게 뻗어야 할 장소에서 휘어지고
머리를 숙여야 할 자리에서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세웠다
오래 머물러야 할 곳은 떠나고
단호하게 끊어야 할 순간에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만 했다
가을만 되면 꽃이 피는데
낭창대는 꽃대궁 들쑥날쑥하다
그동안 살아온 내력이
알록달록 요란하기만 하다
신록 무성할 줄로만 알았던 시절은 가고
산새 소리 영원할 줄 알았던 계절도 가고
동면으로 들어선 독이 잔뜩 오른 독사들
메마른 가지 위에 위태롭게 매달린 낙엽들
밤낮으로 기온 차가 심해지고 있었다
밤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얼른 죽고 싶은 가을이었다
되는 일이라곤 하나 없이
저절로 한숨만 나오는 나에게
높푸른 하늘이 조용히 말을 건넨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런 거라고
신도 처음엔 실수를 한다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노총각에서 독거노인 사이
군대를 전역한 후의 일이었다 나도 언젠가 때가 되면 결혼 정도는 하겠지 생각했다 처음엔 은행원을 배우자로 생각했다 평소 숫자에 약해서 계산이 밝은 여자가 눈에 띄었다 서른 즈음엔 영양사를 아내로 생각했다 요리 잘하는 여자를 만나면 적어도 밥은 굶지 않을 것 같았다 마흔 전후로는 술집을 경영하는 여자를 생각했다 술을 자주 마시다 보니 대작 가능한 사람이 통할 것 같았다 그사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여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먼 훗날 아이를 낳게 되면 양육에 필요한 지혜를 갖춘 여인이 필요할 것 같았으므로
그리하여 결국 나는 혼자가 되었다
그냥 혼자 살기로 했다
사람들은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 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끔 가슴을 할퀴는 시를 만날 때가 있다. 일상의 몽롱함과 무미건조함을 마치 죽비로 내려치는 듯한 통증과 함께 이상야릇한 쾌감을 동시에 느껴지게 하는 작품, 아프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여 하나의 말로서 그 감정을 다 설명하지 못한 채, 어질어질한 머리로 삶의 어느 하루를 보내게 하는 시 작품과 부딪칠 때가 있다. 그것도 운명일까? 자신의 현존을 돌아보게 하는 이런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일 것이다. 그런 작품에서 우리는 예술의 위대함을 느낀다.
-김경복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