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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들판 텅 비게 보이는 것은-박운식 시선집

김남권 2024. 11. 12. 10:45

농부

박운식


오늘도 괭이를 둘러메고 밭에 간다
질긴 뿌리의 나무들이 잡풀들이
밭둑을 넘어
슬금슬금 먹어들어 온다
나무뿌리 풀뿌리를 찍어내야지
젊은 놈들은 다 대처로 떠나고
무디어진 팽이로는 어림없구나
그래도 이 밭을 지켜야지
잠시 먼 하늘 바라보는 사이에도
담배를 피우는 사이에도
내 발바닥 밑으로 담배 연기 속으로
철사보다 질긴 뿌리들이 기어들어 온다
치켜든 괭잇날이 부릅뜬 두 눈이
나무뿌리를 힘껏 내리찍지만
서러움만 가득 밭뙈기에 쌓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골방에서

내가 자는 골방에는 볍씨도 있고
고구마 들깨 고추 팥 콩 녹두 등이
방구석에 어지러이 쌓여 있다
어떤 것은 가마니에 독에 있는 것도 있고
조롱박에 넣어서 매달아 놓은 것도 있다
저녁에 눈을 감고 누우면
그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말소리가 방안 가득 떠돌아다니고
그들이 꿈꾸는 꿈의 빛깔들도 어른거리고 있다
나는 그런 씨앗들의 거짓 없는 속삭임이 좋아서
꿈의 빛깔들이 너무 좋아서
씨앗들이 있는 침침한 골방에서
같이 잠도 자고 같이 꿈도 꾸고 하면서
또 다른 만남의 기쁨을 기다리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묵밭을 보며

산골짝 비탈밭 보리 이삭 팰 때
포로롱 조잘거리며 날아간 파랑새
산 너머에서 피어오르던 목화송이 구름
오늘 그 밭 찾아가 보니
억새풀 찔레 덩굴만 길로 자라 있구나
보리밭 가에 떠올리던 소녀의 얼굴
억새풀 하얀 풀꽃이 바람에 흔들리네
흔들리는 그 너머 너머
어디에 있을까 어렸을 적 묻어둔 꿈
가슴 설레던 보리 이랑들
어디에 아직도 숨어 있을까
먼먼 길 돌아 어머니 보리밭 매시던
비탈밭에 이렇게 와 섰네
바람으로 돌아와 이렇게 서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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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운식 시인 시는 정직하다. 시도 사람도 순박하고 꾸밈이 없다. 삶의 고단함과 아픔과 무거움이 뚝살처럼 박힌 농민시 속에서 만나는 진정성, 박운식 시인 시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 진정성에 있다. 논밭과도 이야기하고 가고 없는 사람들과도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는 시, 따뜻한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시, 꺼질듯한 등불을 들고 밤길을 가는 시, 모두들 도시로 떠나고 없는 폐허 같은 풍경 속에 오늘도 집을 고치고 있는 바보 같은 시, 그런 시들이 모여 있는 시의 사랑방에서 우리는 삶의 진실이 시적 진실이 되는 거짓 없는 목소리를 만난다.
-도종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