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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두고 온 말들-권혁소 시집

김남권 2024. 8. 13. 09:44

그 봄

권혁소

그 후
세상의 모든 봄은 다만
그 봄과 아닌 봄일 뿐이어서
봄도 바다도 더 이상
그때의 빛깔이 아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새벽 생각

그대가
승진에 목매는 걸 보면서
시도 버리겠구나 생각했다

인기 앞에서
좌불안석하는 그댈 보면서
급기야 소설이 망가지겠구나 생각했다

자리에 연연하는 걸 보면서
그대의 운동은




직감했다

슬픈 새벽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선 긋기

퇴직을 앞두고
마음으로 그리는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선 긋기 첫 수업, 선생님은
스치듯이 그리라는데
자꾸자꾸 힘만 들어가
어깨가 뻐근하다 그렇다고
곧은 선을 그리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살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장독대

엄마가 닦던 장독을
아내가 닦는다

익숙해지는 풍경

이 일은 원래
세상 모든 엄마들의 일이었다

나 다시
엄마와 살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오랜 기간 문학 활동을 같이하면서 권혁소 시인과 함께 문학 행사에 참여한 그의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아이들과 서로 할 말 다하며 친구처럼 대하거나 서로 존중해주는 관계가 부럽기도 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한 사람 있다'고 했다. 이를 따른다면 권혁소 시인이 교직 40여 년간 치러낸 마흔 번의 입학식과 서른 아홉 번의 졸업식에서 만난 모든 아이들이 그의 도반이었고 스승이었던 셈이다. 그는 단순한 교사가 아니라 동류의 인간으로, 어른으로, 아이들과 같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삶을 즐기고 혹은 현실을 아파했지만 그래도 거기에 두고 온 아직 못 다한 말이 있다. 오직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아린 마음, 그것이 이 시집의 말이다.
-이상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