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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나는 자꾸자꾸-손준호 시집

김남권 2024. 6. 4. 07:42

보약

손준호

할매국밥집에서
홀로 술국 먹은 새벽
취기 털고 일어서는데

'보약 달이는 심정으로
정성껏 끓였습니다'

플래카드와 눈 맞아
힘을 내 다시
남은 국물을 훌훌 긁어 마시고
남은 소주도 탈탈 털어 마셨다

생은 가끔
소주보다 독하고
술국보다 뜨겁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순산

저물녘 기어 나온 땅거미처럼
노파가 허릴 낮춰 포도를 따고 있다

톡,
포도나무가 탯줄을 끊자

첫 아이를 받아 안듯이

두 손으로 조심조심히
거룩한 순교자들을 건네받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홍시분계선

옆집 감나무 가지가 담 넘어
마당에 축 쳐져 내려옵니다
홍시를 주렁주렁 달고서

경계를 넘어버린 가지들
사람이나, 나무나
자식들은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일까

군사분계선 넘으면 우리 거 아이가!
노모가 환갑 넘은 맏이에게 농을 던지자

이웃끼리 싸우면 안 된다고
까치밥도 남길 줄 알아야 한다고
감나무는 말없이 가지를 한번 흔들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손준호의 손바닥 시집을 들여다보면 세 가지 손금이 존재한다. '나正-너反-우리合'이라는 손금이다. "그대라는 나무 그늘 들어 그루잠을 깨고 싶었"으나 "나를 가져간 봄은 아직 나를 돌려주지 않았다"(초여름)고 한 것처럼, 나-너가 정正과 반反의 대립 및 갈등 양상을 띤다. 그것은 "당신 앞 서성이는/발자국의 짧은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어쩌자고 나는 자꾸자꾸"(겨울비) 두서없는 독백을 남기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처럼 나(자아)와 너(세계)의 불화나 이별이란 비극적 인식 하에 갈등 극복 방안으로 자기희생과 자기부정의 삶의 태도를 취하는 바, "나의 아픈 계절이 너의 환한 봄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통해 우리라는 합의 경지를 이끌어낸다. 손준호 시인의 보다 거룩한 미덕은 "말라 가는 지렁이의 혼을 주머니에 담을 것"(버킷리스트)을 다짐하거나 "비단개구리 폴짝거리는 마당에 나가 비를 맞았다"(입하)고 토로하듯이 미물을 따뜻하게 감싸고 위무감으로 공동선을 추구하는데 있다.
-장하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