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경첩
안이숲
문틈에 나비 한 마리 다소곳 날개를 접고 있어요
놋쇠 장식으로 된 나비로 태어나 제대로 날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봄이
여름을 건너 뛰려 하고 있네요
종손이라는 이름에 걸린 가문 한 채 간수하느라
공중을 떠돌아 잔잔한 이곳에 뿌리를 내린 당신
방문이 열릴 때마다
낮은 발자국 소리에 묻은 녹슨 고백 소리 들려옵니다
솜털이 시작되는 고향에서 나비 무늬 박힌 치마저고리 입고 의령장에 구경 가던
팔랑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가볍게 날아오르던
어머니의 원행遠行엔 연지곤지 찍은 꽃들마저 고개를 숙였던가요
얘야! 시집와서 빗장을 지키는 게 평생의 일이었단다
느리게 접힌 쪽으로 아픈 고백을 쟁여둔 어머니
다음 생에는 날개를 달고 태어나지 마세요
몇 겹으로 박제된 풍장의 어머니
쇳가루 떨어지는 서러운 날갯짓 소리 수없이 들었어요
빗장에 방청 윤활제를 솔솔 뿌리면
마당 한 귀퉁이의 세월에 퍼렇게 멍든 잡초가 피어오르고
당신은 눈코입이 삭아 자꾸만 떨어져 내립니다
붉은 눈물이 소리가 되어 공중을 묶어 놓고
납작하게 접힌 마음을 일으켜 이제 편안하게 쉬셔요
여닫이에 꼿꼿한 등을 붙들린 지 수십 년
뒷목부터 낡아가는 수의는 그만 벗으셔도 돼요
염습을 마친 8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겹겹이 에운 문틈 사이로 녹슨 쇠 울음소리 선명하게 들려 오는 밤
당신의 평생 어디쯤에서 터지는 발성법을 익혀
이리도 가늘고 긴 곡비哭비를 준비했을까요
우리 한 번은 서로를 열어야 하는데
어머니, 어느 쪽이 제가 돌아갈 입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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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A+
앗, 하고 태어난 생명체 하나
가스레인지 위에서 급히 동그랑땡을 굽다가 기름이 옆구리에 튀었다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고 보니 지렁이 한 마리가 근처에 부푼 집을 지었다
그래 너도 생명이니 잘살아 보거라
소꿉장난을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다 빨래를 짜면 흙물이 뚝뚝 떨어졌다 동생은 강아지를 데리고 자주 나갔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2월이었다 동생이 국도 3호선 바퀴에 깔려 세상에서 삭제되었다 아무도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다 마루 끝에 앉아 반쯤 마른 무를 씹으며, 거짓말 같은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와 함께 온 점쟁이의 입에서 동생이 부활했다 누나, 누나, 내 용돈 숨긴 곳 알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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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지난 시간을 삭제하고 옷을 벗어 보니
한껏 부풀어 오른 지렁이가 말라 터져
선명하게 F를 그려 놓고 있다
그러니깐 이건, 지렁이가 매긴 나란 사람의 점수
쇠고기 등급보다 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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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불꽃
불은 정말 눈물을 흘리는 걸까
남자는 눈물을 보기 위해 불을 피워 보았다고 한다
허공의 불꽃에
물음표를 남길 때
움찔, 불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조립식 지붕 위에서 불붙은 용접 모자를 쓰고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를 본 적이 있다
쇠보다 더 오그라진, 화상으로 얼룩진 남자의 가슴
허리를 또르르 말고 번데기보다 더 정확한 번데기의 자세로 누워있었다
119 들것에 실려 새하얀 고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화火를 이마 주름에 새기고 있었다
불이 울고 있었다
남자의 갈비뼈에 불길이 번진다
천년을 묵묵하게 서 있던 나무도
나무 같은 남자도
불을 만나
한번 울기 시작하면 아무도 말릴 재간이 없다
타닥타닥
불은 소리로 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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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숲의 첫 시집 '요즘 입술'을 읽으면서, 필자는 여러번 놀랐다. 저 남쪽의 한 지역에서 오랜 습작으로 시를 쓰고 마침내 시집 한 권을 묶는 신인의 시가 이렇게 웅숭 깊은 의미망을 형성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인의 단계에서 흔히 보이는 미숙함이나 어설픈 치기가 없을뿐더러 각기의 시가 진솔하고 절박하여 은연중에 시읽는 기쁨을 누리게 하지 않는가. 시인의 시에는 지적 유희나 이미지의 파장과 같은 생경한 제스처가 없다. 자신이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 가운데서 소재를 얻고 이를 재치있고 순발력 있게 시화한다. 시인이 활용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나 표현에 있어서의 은유적 기법은 어느결에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여 그 시 세계에 편만하다.
-김종희 문학평론가